조조의 입가에 냉소가 맺혔다.
"그럼 연명부에 서명한 것은 무엇이오?"
4인의 안색은 동시에 흙빛이 되고 말았다. 그들을 약속이라도 한 듯 부르짖었다.
"맹세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흥! 과연 끝까지 발뺌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소."
조조가 손짓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진경동이 들어섰다. 4인은 그를 보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조조는 진경동에게 물었다.
"너는 이들을 본 적이 있느냐?"
진경동은 힐끗 4인을 보더니 대답했다.
"소인이 일하는 부중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꼿꼿이 들며 4인을 향해 소리쳤다.
"어르신들이 조대공을 시해하기 위해 연명부에 서명하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어찌 부인하시는 것이오?"
그 말에 4인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한참 후에야 왕자복이 손가락으로 진경동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놈은 동공의 시첩과 간통하다 들켜 문책을 당한 놈입니다! 대공께서는 저 놈의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조조는 히죽 웃으며 반문했다.
"길태가 날 독살하려던 것이 동승이 시킨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대들 역시 한통속이 아니던가?"
"통촉하십시오! 그런 일은 없었소이다!"
왕자복 일행이 일제히 부인했지만 조조는 유들유들하기만 했다.
"오늘밤 모든 것을 실토하면 용서할 것이나 끝까지 속이려 든다면 추호의 용서가 없을 것이오."
왕자복 일행은 바닥에 엎드리며 외쳤다.
"맹세코 아니올시다. 헤아려 주시오!"
조조의 입에서 싸늘한 외침이 떨어졌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단 말인가? 여봐라! 저들을 모두 가두어라!"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 들어와 4인을 결박해버렸다. 왕자복 등 4인은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음날 조조는 무사들을 이끌고 동승의 집으로 향했다. 명목상으로는 동승의 병문안을 간다는 것이었다.
전갈을 받은 동승은 몸소 문 앞까지 나와 영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조조를 대청으로 모셨다.
"그래, 어젯밤에는 왜 연회에 나오지 않으셨소?"
조조는 좌정하자마자 물었다. 동승은 기어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신병으로 인해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소이다."
"그 신병이라는 것이 혹 무림을 근심해서 생긴 병이 아니오?"
동승이 아연하여 대답하지 못하자 조조는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공은 길태에 대한 말을 들었소이까?"
동승은 움찔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이다."
"공이 어찌 그 자를 모른다고 하시오?"
조조는 냉소하더니 주위에 명을 내렸다.
"동공의 병이 정말 깊은 것 같소이다. 여봐라, 그놈을 끌고 오너라."
수십 명의 무사들이 만신창이가 된 길태를 질질 끌고 왔다. 강제로 대청 아래 무릎을 꿇린 길태는 단상의 두 사람을 보더니 버럭 외쳤다.
"악적 조조야! 이번엔 또 무슨 계략을 꾸미려는 거냐?"
조조는 그는 상대하지도 않고 동승을 향해 말했다.
"저놈이 이미 왕자복과 충집, 오석, 오자란이 공모했다고 실토했기에 모두 잡아넣었소이다. 그런데 아직 한 명을 잡지 못했소이다."
그는 동승이 전신을 경련하는 것을 눈여겨 본 후 이번에는 길태를 향해 물었다.
"누가 너더러 독약을 타라고 시켰느냐? 어서 고하지 못하겠느냐?"
길태는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느닷없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핫......!"
한참 동안이나 이어지던 광소가 뚝 그쳤다. 길태는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오냐, 말해주마. 하늘이 내게 시켰다. 이제 되었느냐?"
조조는 대로하여 명을 내렸다.
"저놈을 죽지 않을 만큼 쳐라!"
무사들이 달려들더니 철봉으로 길태를 내리쳤다. 한번씩 칠 때마다 피가 튀며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그것을 본 동승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가슴이 갈가리 찢겨져나갈 듯한 심정이었다.
"그만."
조조는 매질을 중지시켰다. 그의 눈길은 길태의 오른손 약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손가락은 본래 성했거늘 어째서 약지를 다쳤느냐?"
길태는 혼미한 가운데서도 의연하게 말했다.
"널 죽이기 위해 맹세하느라 깨물었느니라!"
조조는 격분하여 외쳤다.
"저놈의 손가락을 모두 잘라버려라."
허공에 칼 빛이 번뜩이는 순간 길태의 열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가고 말았다. 조조는 음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열손가락이 다 잘렸으니 이제 또 무엇으로 맹세하겠느냐?"
길태는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아닌 피가 흘러내렸다.
"아직은 입이 있으니 널 욕하고 꾸짖을 수 있노라!"
마침내 조조도 냉정을 잃고 말았다.
"저놈의 혀를 잘라버려라!"
그러나 이때 길태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더는 못 견디겠소. 실토할 테니 이제 그만 풀어주시오."
조조는 의심스런 눈으로 길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너덜거리는 그를 풀어준다고 한들 별일이 있으랴 싶은 마음이 들었다.
"혈도를 풀어 주어라."
혈도가 풀린 길태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무황성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올렸다.
"신이 무능하여 폐하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사오니 벌하여 주옵소서."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길태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날려 섬돌에 머리를 부딪쳐 버렸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가 박살나며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 저놈이!"
조조는 놀라 몸을 일으켰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길태는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벌렁 누워있었는데 죽으면서도 눈을 부릅뜬 채 누군가를 꾸짖는 듯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