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는 소패에 이르자 문루를 향해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하지만 여포가 워낙 바짝 추격해 온 터라 문루 위의 궁수(弓手)들은 감히 활을 쏠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유비가 맞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유비의 뒤를 이어 여포가 소패로 따라 들어오고 말았다.
천하제일고수인 여포가 들이치니 소패에 남아있던 무사들은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사방으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여포는 천극도를 휘두르며 소패를 종횡무진 휩쓸어버렸다.
형세가 급박하자 유비는 가족을 돌볼 겨를조차 없었다. 그는 감히 부중으로 가지 못하고 필마단기로 소패를 가로질러 서문을 통해 달아나고 말았다.
여포가 부중에 이르자 미축이 정중히 그를 맞이하며 말했다.
"대장부는 남의 처자를 죽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여공과 더불어 천하를 다투는 것은 오직 조공뿐입니다. 저의 주공께서는 지난날 여공께서 활을 쏴 천극도의 수술을 맞힘으로써 구해주신 은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일은 조공께 의탁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일 뿐이니 부디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정중하되 조금도 비굴하지 않은 청탁이었다. 여포는 슬며시 마음이 약해졌다. 더구나 자신이 조조와 천하를 다투는 쌍벽(雙璧)이라고 추켜올리니 기분이 좋아졌다.
"유공과 나는 형제와 같은 사이다. 비록 오해로 인해 창칼을 맞대게 되었지만 그의 처자를 죽일 리야 있겠느냐?"
그는 껄껄 웃으며 미축으로 하여금 유비의 식솔을 데리고 서주로 가 편히 지내라고 명령했다. 그야말로 강자의 아량을 보인 것이다. 그는 정리가 끝나자 고순과 장요를 소패에 남기고 서주로 돌아갔다. 머지않아 들이닥칠 조조의 본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필마단기로 간신히 소패를 탈출한 유비의 신세는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아아! 또 다시 가족과 형제들을 잃고 말았구나! 한두 번도 아니고 번번이 이 지경이 되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유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무림에 나온 지 대체 몇 년인가? 하지만 아직도 꿈이 이루어지기에는 요원했다. 그는 신세를 한탄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벌판을 가로질러갔다.
얼마나 갔을까? 문득 말발굽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쫓아오는 자가 있었다. 돌아보니 역시 말 한 필에 의지한 채 손건이 따라오고 있었다. 유비는 손건을 만난 후 한탄했다.
"나는 두 아우가 죽었는지 살아있는지도 모르고, 가솔들도 모두 잃고 말았네.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손건의 표정도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은 조조에게 의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연후에 차차 방도를 마련해야지요."
유비 역시 별다른 수가 없는지라 두 사람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허도로 향했다. 가는 도중 행여나 여포의 추격이 있을까봐 되도록이면 소로를 택했다. 다행인 것은 인가가 나올 때마다 유비를 알아본 양민들이 앞을 다투어 의복이며 음식들을 제공해 온 것이었다. 그들은 유비가 서주와 소패에서 무림인들은 물론 양민들에게 덕을 베푼 점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유비로서는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산중의 한 초막에서 하룻밤을 청하게 되었다. 초막집의 주인인 청년이 나와 절을 하며 공손히 맞이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소생의 천명은 유안(劉安)이며 사냥꾼이옵니다."
유비는 초막집에서 지친 몸을 쉬게 되었다. 밤이 되자 허기가 몰려와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초막집의 사정이 뻔히 짐작되는 지라 주린 배를 안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엌에서 구수한 냄새가 나더니 잠시 후 성찬(盛饌)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게 며칠 만에 맛보는 건가?'
유비는 고기를 한 점 집어먹은 후 감격에 겨워 유안에게 물었다.
"이 고기가 무엇이기에 이리 맛있는 것이오?"
유안은 태연히 대답했다.
"이리 고기이옵니다."
청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유비는 포식을 한 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 떠나기 위해 말을 끌어내려 뒤뜰로 갔던 그는 부엌에서 죽어있는 젊은 여인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더구나 여인의 시신을 살펴보니 팔이며 허벅지 살이 도려내져 있었다. 그는 청년을 불러 다그쳤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청년은 그제야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다.
"존경하옵는 유대공께 아무것도 드릴 게 없어 아내의 몸을 빌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유비는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맛있게 먹은 고기! 이리 고기인줄만 알았던 것이 유안의 젊은 아내였다니! 그는 먹은 것을 몽땅 토해내고 싶었지만 자신을 위해 아내를 죽인 청년의 충심에 어찌할 바를 모를 뿐이었다.
식인(食人)을 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한 것은 아니었다. 드넓은 대륙에서 살아남기 위해 식인을 하는 것은 난세(亂世)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청년이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제공했다는 사실에 그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청년의 손을 잡고 뭐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하고많은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후 그는 청년의 손을 놓고 말 위에 올랐다.
청년은 그에게 큰절을 하며 말했다.
"유대공을 따르고 싶지만 노모가 집에 계셔서 떠나지 못하니 용서하십시오."
유비는 다시 한번 감동을 금치 못하여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며 초막을 떠났다.
얼마나 갔을까? 지평선에 풍진(風塵)이 자욱하게 일더니 엄청난 대군이 나타났다. 유비는 흙먼지 속에서 휘날리는 기치를 보고 그것이 조조의 본진임을 알아보았다.
"아니? 유공이 아니오?"
조조는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는 유비를 보고 놀라 물었다.
유비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조조는 그가 소패를 잃었을 뿐더러 두 아우와 헤어지고 식솔들까지 적의 손에 빼앗겼다는 말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모두 내가 부덕한 탓이오. 공연히 유공을 위경에 빠뜨렸구려."
조조는 유비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 과연 그가 진심으로 유비를 위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변 사람들이 볼 때는 무척이나 후덕한 모습이었다. 유비는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초막집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조조는 감동하여 눈시울이 붉어진 채 탄성을 발했다.
"오오! 그런 일이 있었소? 그야말로 대대손손 충심의 표본이 될만한 일이구려!"
조조는 손건에게 금 100냥을 내주어 유안에게 갖다 주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어 행군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