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황 일행이 어렵게 배에 오르자 갑자기 무사들이 앞으로 다투어 둑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은 서로 배에 타기위해 아우성을 치며 뱃전에 매달렸다.
"이 놈들!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이낙이 욕설을 퍼부으며 칼을 휘둘렀다. 무사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황하에 빠지고 말았다. 이낙에 의해 손목이 잘린 자들이 강물에 떠내려가며 울부짖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한참 후 무황 일행은 황하를 건널 수 있었다.
배는 다시 돌아가 무황의 식솔들과 가신들을 차례로 실어왔다. 하지만 배 하나로 모두 싣고 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한 가신들과 무사들은 이각, 곽사의 추격대에 사로잡히거나 황하에 투신하며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유협은 몇 안 되는 측근들과 함께 다시 도망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마차도 말도 없었다. 그나마 양봉이 인근의 농가에서 수레를 얻어와 유협과 무황후를 태운 채 대양(大陽) 쪽으로 향했다.
날은 어두워지고 날씨는 추워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일행은 한 민가에서 쉬기로 했다. 간신히 황하를 건넌 그들에게 양식이 있을 리 없었다. 유협과 무황후는 허기진 배를 움켜쥔 채 잠을 청하려 했지만 주린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나 잠이 오지 않았다.
다행히 인근의 촌로가 잡곡밥을 지어다 바쳤다. 무황 부부는 함께 식사를 하려했지만 비참한 마음에 그만 목에 메어 그나마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날이 밝자 유협은 이낙과 한섬에게 작위를 내린 후 길을 재촉했다. 얼마쯤 갔을까? 어디에선가 두 사람이 달려오더니 유협에게 절을 하며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닌가?
"오오ㆍㆍㆍ 그대들은?"
유협은 그들을 알아보고 반색했다. 그들은 무황가의 가신인 유표와 한융(韓融)이었다. 유협은 그들을 만나자 더욱 비통한 마음이 들어 손을 잡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삼킬 뿐이었다.
한융이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두 도적이 신의 말은 비교적 듣는 편이니 죽음을 불사하고 그들을 만나 화해를 도모해 보겠습니다."
유협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오. 공연히 그대마저 잃게 될까 두려울 뿐이오."
한융은 고집을 부렸다.
"아니옵니다. 반드시 성사시켜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융은 유협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방향을 돌려 이각, 곽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유랑의 길은 고달팠다. 변변히 먹지도 못한데다 노독이 겹쳐 무황후는 그만 병이 나버렸다. 그 바람에 잠시 행렬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유협은 무황후가 걱정되어 잠시도 자리를 뜨지 않고 간호했다. 저녁에 양표가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근처에 안읍(安邑)이란 곳이 있습니다. 임시로 그 곳에 머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협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안읍에 진을 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안읍이란 곳은 형편없이 쇄락한 촌락이었다. 큰 집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었고, 고작해야 띠집 몇 채가 드문드문 있을 뿐이었다. 무황 부부는 띠집을 한 채를 얻어 그 곳에 여장을 풀 수밖에 없었다.
가신들과 무사들은 띠집 주위에 진을 치고 흙바닥에 앉아 무황성의 장래를 논의했다. 회의를 할 수 있는 대전이나 무사들이 수련할 수 있는 연무장과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고, 무황과 무황후는 울타리도 없는 띠집에서 간신히 이슬이나 피하는 정도였다.
반면 이각은 기세가 오를 대로 올라있었다. 그는 어디서 긁어모았는지 도적, 무뢰배 따위를 몰고 와 유협을 협박하여 그들에게 모두 한 가지씩 직책을 내려주도록 요구했다. 그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툭하면 가신들이나 무황의 식솔에게 욕을 퍼부었을 뿐더러 어떨 때는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동승, 양봉 등은 격분을 금치 못했지만 자칫하면 내분을 일으키게 될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났다. 한융이 돌아온 것이다. 한융은 온갖 감언이설로 이각과 곽사를 설득하여 그들에게 붙잡혀 있던 가신들과 무황가의 식솔들을 구해 돌아온 것이었다.
이각, 곽사가 한융의 설득에 응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가신들의 대부분이 무림의 각 방파 출신들이므로 그들의 속해 있던 방파나 호웅들의 반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무황 일행이 안읍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황가가 단시일 내에 일어서기가 불가능하다는 점도 고려했던 것이다.
무황이 안읍에 자리 잡자 하내의 호웅 장양(張楊)은 모른척할 수가 없었다. 그는 쌀과 고기 등 식량을 몇 대의 수레에 싣고 찾아와 무황을 위로했다. 또한 하동의 왕읍(王邑)은 의복이나 피륙, 일상용품 따위를 보내왔다. 그로 인해 유협은 간신히 궁색함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동승과 양봉은 낙양으로 사람을 보내 옛 무황성을 재건하기로 했다. 비록 인력이나 자금을 조달할 길은 막막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낙양으로 돌아가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유협 또한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낙이 요지부동, 도무지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동승이 그를 설득해 보았다.
"낙양은 본래 무황성이 있던 곳이오. 무황께서 어찌 이 작은 곳에서 무림을 다스릴 수 있단 말이오? 그러니 낙양으로 옮기는 것이 백번 옳은 일이오."
이낙은 코웃음 쳤다.
"정 그렇다면 당신들이나 가시오. 난 이 곳에 남겠소."
이낙의 의중을 도통 알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동승과 양봉은 유협을 모시고 낙양으로 떠날 채비를 차렸다. 그 날 밤이었다. 야음을 타고 어딘가로 빠져나가는 자가 있었다. 양표가 그 자를 붙잡아 보니 이낙의 수하로 품속에 밀서를 숨기고 있었다.
밀서를 읽어보니 놀랍게도 이낙이 이각, 곽사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밀서의 내용은 무황을 붙잡아 둘 테니 안과 밖에도 동시에 쳐서 무황을 죽이자는 것이었다.
유협은 보고를 듣고 치를 떨었다.
"역시 도적놈이라 믿을 수가 없구려!"
동승과 양봉은 그 밤으로 유협을 호위하여 낙양으로 출발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이낙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각, 곽사가 도착하기 전에 스스로 수하들을 이끌고 무황 일행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무황 일행이 기산(冀山) 아래 이르렀을 때였다.
"멈춰라! 이각과 곽사가 여기 있다!"
그것은 이낙이 수하들에게 사칭하도록 시킨 것이었다. 고함소리와 함께 후미에서 불빛이 밝혀지며 말발굽소리가 광풍처럼 몰아쳐 왔다. 유협은 소스라치게 놀라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양봉이 잠시 귀를 기울여 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들은 이낙의 수하들입니다. 폐하."
유협은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양봉은 서황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라고 명령했다.
이낙은 상대편에서 서황이 나서자 창을 꼬나 쥐고 달려 나갔다. 두 필의 말이 질풍처럼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가더니 스치듯이 빗겨갔다. 그 순간이었다. 서황의 도끼가 번쩍 빛을 발하며 이낙의 목을 내리쳤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이낙의 목이 떨어지며 피분수가 치솟았다. 목을 잃은 이낙은 한동안 달려가다 말과 함께 절벽 아래로 추락해버렸다.
서황은 내친 김에 도적무리들에게 뛰어 들어가 도끼를 휘둘렀다. 그의 도끼 솜씨는 무림의 일절(一絶)이라 불릴만했다. 우두머리를 잃은 도적 떼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서황의 도끼가 번뜩일 때마다 서너 명의 목이 달아나고 사지가 토막 나자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버렸다.
무황 일행은 밤을 새워 기산을 넘었다. 날이 밝자 하내의 호웅 장양이 무리를 이끌고 달려와 알현했다. 장양은 무황을 신봉하는 의미로 상당한 양의 양식과 피륙을 바쳤다. 유협은 그에게 작위를 내리며 변함없이 무황성을 보위할 것을 독려했다.
장양은 한동안 무황의 행렬을 호위해 주었다. 낙양이 가까워지자 그는 행렬을 멈추며 유협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제 더 이상 추격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이제 그만 하내로 돌아가 무황성이 재건될 날을 고대하겠소이다."
유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을 곁에 두고 싶지만 하내의 안위도 중요하니 그대의 뜻을 받아들이겠소. 훗날 웃으며 다시 만나리라 믿소."
장양은 수하들을 이끌고 하내로 돌아갔다. 얼마 후 유협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낙양에 당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