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몸이라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관우였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무공이라곤 전혀 모르는 두 분 형수가 있었다. 따라서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화 노인을 볼 때 그의 아들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심사숙고 끝에 관우는 호반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위는 고요하기만 할 뿐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 냄새는?'
그는 코를 벌름거렸다. 어디선가 기름 냄새가 풍겨온 것이다.
"서둘러라!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피곤에 지쳐 곯아떨어진 시종들을 깨운 그는 두 부인을 수레에 태운 후 북문을 향해 달렸다. 호반이 미리 손을 써둔 듯 북문은 열려 있었고 앞을 가로막는 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사히 형양지부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 뒤를 돌아보니 형양지부가 화염에 싸여있는 것이 보였다. 위치로 볼 때 방금 전에 그가 있던 객관이 틀림없었다. 관우는 한숨을 쉬었다.
'호반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그는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달려도 수레의 속도는 원체 느렸다. 그들 일행이 4~5리쯤 갔을 때 뒤쪽에서 급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관우가 고개를 돌려보니 수많은 횃불이 일렁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관우는 시종들에게 먼저 가라고 이른 후 길목을 가로막고 섰다.
"관운장은 멈추어라!"
횃불무리가 다가오는 가운데 왕식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관우는 선두에서 달려오고 있는 왕식을 발견하고 냉엄하게 외쳤다.
"네놈은 어찌하여 날 불태워 죽이려 했느냐!"
왕식은 화공이 실패로 돌아가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자신이 관우의 적수가 못된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사납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놈아! 한복이 내 친척이다! 네놈의 목으로 제사 지내야겠다!"
관우는 냉정하게 왕식을 노려보다 청룡언월도를 비스듬히 눕혀 휘둘렀다. 왕식은 도광이 뻗어오는 것을 보고 아차 싶었지만 달리는 기세를 갑자기 멈출 수가 없었다.
"크아악!"
단말마와 함께 왕식의 상반신이 잘려나갔다. 그래도 여전히 하반신은 마상에 앉아 있었다. 그의 말은 주인이 죽은 지도 모른 채 관우의 옆을 스쳐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기세 좋게 달려오던 형양지부의 무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방금 전까지 시퍼렇게 살아있던 왕식이 상반신만 남은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아......!"
누군가의 입에서 공포에 찬 부르짖음이 흘러나왔다. 순간 약속이나 한 듯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여기저기 바닥에 널려있는 횃불로 인해 주변은 대낮처럼 밝았다. 관우는 청룡언월도로 횃불 하나를 찍어 올린 후 왼손에 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도 이 하나로 충분히 밝힐 수 있건만 어찌하여 인간의 마음속은 밝힐 수 없단 말인가?"
그는 말머리를 돌려 수레가 간 방향을 향해 달렸다.
유연(劉延)은 관우가 인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수하들과 함께 달려 나갔다.
관우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인마를 보고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인마의 수가 고작 수십 기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선두의 인물이 유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말을 멈추며 물었다.
"유공은 그간 안녕하셨소?"
관우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유연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관공은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형님을 찾아가는 길이오."
"유현덕공은 지금 원소와 함께 있지 않소? 원소로 말할 것 같으면 조대공의 숙적인데 공이 그리로 가는 것을 윤허하실 리가 없지 않소?"
관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대공께서는 전일에 나와 언약한 일이 있었소이다."
유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공이 원소에게 가려면 황하를 건너야 하지 않소? 하지만 황하의 나루터는 하후돈의 문하인 진기(秦棋)가 지키고 있소이다. 아마도 그는 공이 건너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관우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유공이 배 한 척을 내주면 되지 않소?"
유연은 흠칫하더니 뒤로 물러섰다.
"배야 있지만 내어 드릴 수 없소이다."
관우는 눈썹을 꿈틀하며 말했다.
"내가 전에 안량과 문추를 죽여 유공의 액을 풀어드린 적이 있거늘 어째서 배 한 척에 그리 인색하단 말이오?"
무황성 동군 지부장을 맡고 있던 유연은 원소가 쳐들어 왔을 때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관우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의 입장은 몹시 곤궁해졌을 것이다.
관우의 말에 유연은 얼굴이 붉어졌으나 고개를 저었다.
"도리야 그렇지만 나중에라도 하후돈이 알까봐 어쩔 수 없소이다."
"그대를 장부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이구려."
관우는 혀를 차며 그를 지나쳐 황하로 향했다. 일행이 황하의 나루터에 이르자 진기가 일단의 무사들을 대동하고 앞을 가로막았다.
"거기 오는 자가 누구요?"
관우는 적토마를 세운 채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관우라 하오."
진기는 눈을 번들거리며 재차 물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오?"
"형님을 찾아 하북으로 가는 길이오. 강을 건너게 해주시오."
"조대공의 허락은 받았소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