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는 그날 밤 손건을 놓아주었다. 다음날 그가 출정하자 맞은편에서 공도가 나와 싸움을 걸었다. 관우는 질풍처럼 말을 몰아 달려갔다. 공도는 그와 맞서 싸우는 척하다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며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관공은 옛 주인을 잊지 마시오. 내 여남을 내드릴 테니 계속 추격하는 척하시오."
관우는 그것이 손건의 계책임을 알고 수하들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조조의 무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자 유벽과 공도의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버렸다.
관우는 여남을 되찾은 후 허도로 돌아갔다. 조조는 소식을 듣고 멀리까지 나와 그를 영접한 후 무사들에게 고루 상을 내려주었다.
그날 조조가 베푼 연회에 참석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관우는 안채로 가 두 형수에게 문안인사를 드렸다. 감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아주버니께서는 두 번이나 출정했는데 그 분의 소식을 들으셨는지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관우는 간단히 대답하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가 떠난 후 두 부인 크게 낙심하여 대성통곡했다.
"그 분께서는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어. 흑흑!"
"맞아요, 아주버니께서 우리가 마음 아파할까봐 말씀을 안 하시는 것이 틀림없어요."
두 부인이 서럽게 우는 것을 보다 못한 관우의 수하 한 사람이 몰래 들어와 말했다.
"두 분께서는 울음을 그치십시오. 주공께서는 지금 하북의 원소에게 가 계신답니다."
감부인과 미부인은 깜짝 놀랐다.
"네가 그걸 어찌 안단 말이냐?"
"관공을 모시고 출정했다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감, 미 두 부인은 즉각 관우를 불러 따졌다.
"그 분은 아주버니를 버린 적이 없는데 그대는 조조의 은혜를 입자마자 과거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군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관우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조아렸다.
"형님께서 하북에 계신 것은 확실하오나 두 분 형수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혹시나 누설될까 두려워서였습니다. 이 일은 서둘러 될 일이 아니니 신중해야 합니다."
그 말에 비로소 두 부인은 안심했다.
"저희들의 좁은 소견으로 공연히 아주버님을 의심했습니다. 그럼 속히 방도를 마련해 주세요."
한편 조조는 장요에게 관우를 찾아가 보라고 지시했다. 유비가 원소에게 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장요는 관우를 만났다. 그는 조조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관우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공도 유공의 소식을 들었을 텐데 어째 안색이 좋지 않소이까?"
관우는 탄식하며 말했다.
"옛 주인이 살아 계시는데 아직 만나 뵙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기쁘겠소?"
장요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공과 유대공의 교분이 저와 공 사이를 비교하면 어떻소?"
관우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와 장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친구라고 할 수 있소. 그러나 나와 형님은 친구이면서 형제요, 형제이면서도 주종(主從) 관계니 어찌 함께 논할 수 있겠소?"
장요는 실망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물었다.
"유공이 계신 곳을 알았으니 공은 필경 떠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오?"
"그야 전일에도 말한 적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오. 그대는 부디 날 생각해서라도 조대공께 여쭤주기 바라오."
장요는 관우와 나눈 대화를 그대로 조조에게 전했다. 그런데 조조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내게 그를 붙들어 둘 방도가 있네."
한편 이제나 저네나 떠날 생각만 하고 있는 관우에게 옛 친구가 찾아왔다는 전갈이 왔다. 관우가 만나보니 도무지 생면부지의 인물이었다.
"그대는 뉘기에 옛 친구라 하는 건가?"
"소생은 원대공의 수하에 있는 진진(陣震)이란 사람입니다."
관우는 좌우를 물리친 후 그를 내실로 청해 물었다.
"선생이 이렇게 오신 데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오."
진진은 품속에서 한 통의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관공이 받아보니 눈에 익은 글씨체야 말로 그리운 유비의 것이었다. 그는 격동으로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서신을 읽었다.
<운장은 보아라. 나 현덕이 그대와 더불어 도원에서 결의를 맺고 한 날 한 시에 죽을 것을 맹세하였건만 어찌하여 맹세를 저버리고 의리를 끊으려 하는가? 끝내 그대가 부귀영화를 도모코자 한다면 내 머리를 바쳐서 그대의 공을 이루게 하겠노라. 할 말은 태산처럼 많으나 글로는 다 할 수 없으니 오직 그대의 답신을 기다릴 뿐이노라!>
관우는 서신을 다 읽은 후 한참 동안을 목 놓아 울었다.
"아우가 형님을 잊고 찾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형님의 생사를 몰랐기 때문이었소! 내 어찌 부귀 따위에 연연하여 맹세를 버린 단 말이오?"
진진은 탄식하며 말했다.
"유공께서는 그대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옛 맹세를 버리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떠나는 것이 옳지 않겠소?"
관우는 눈물을 훔치며 의연하게 말했다.
"시종(始終)을 모르면 군자가 아니라고 했소. 내가 여기 올 때 광명정대했으니 갈 때도 그리해야 하겠소. 답신을 써줄 테니 형님께 전해 주시오. 나는 곧 조조를 만나 고별인사를 한 후 두 분 형수님을 모시고 가겠소."
진진은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쩌겠소?"
"죽을지언정 여기 머물지는 않을 것이오."
"그럼 속히 답을 써주시오. 유공께서는 일각여삼추일 것이외다."
관우는 붓을 들어 자신의 심경을 구구절절 적어 내려갔다. 서신을 쓰는 동안 그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종이를 흠씬 적셔놓았다.
진진이 서신을 받아 돌아간 후 관우는 안채로 가 두 부인에게 방금 전의 일을 말해주었다. 두 부인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관우는 하직인사를 하러 조조를 찾아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조가 그를 만나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우울한 마음을 안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오후에 다시 부중으로 갔지만 조조는 여전히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후로도 몇 번씩이나 방문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그는 장요에게 부탁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장요도 병을 핑계대고 만나주지 않았다.
관우는 어쩔 수 없음을 느꼈다.
'조조가 만나주지 않는 것은 날 붙들어 두기위한 속셈이다. 하지만 작심한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는 떠날 결심을 굳히고 조조에게 고별서신을 보냈다.
다음날 그는 조조에게서 받은 비단이며 금은을 단단히 봉해 곳간에 넣어두고 만승무후의 인(印)도 품에서 꺼내놓았다. 감, 미 두 부인을 수레에 싣고 적토마에 오르니 그를 따르는 자는 고작해야 시종 십여 명밖에 없었다. 일해은 잠시 후 북문에 이르렀다. 북문에는 수백 명의 무사들이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너희들을 해칠 생각이 없으니 문을 열어라! 그렇지 않으면 이 칼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치켜들며 외치자 무사들은 겁을 집어먹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관우는 문을 통과한 후 시종들에게 당부했다.
"너희들은 수레를 모시고 먼저 가라. 추격해오는 자들은 내가 막겠다."
시종들은 복명하고 수레를 몰고 달려갔다. 관우는 수레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말머리를 돌려 북문을 가로막고 우뚝 섰다. 설사 천군만마(千軍萬馬)가 몰려온다 한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듯한 태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