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량은 놀라 칼을 뽑으려 했지만 어찌된 셈인지 손발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순간 섬광이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안량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목이 잘리고 말았다.
관우는 청룡언월도로 바닥에 뒹굴고 있는 수급을 찍어 올린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천 명의 무사들이 그를 향해 달려오다 놀라 뒷걸음질치는 것이 보였다. 관우는 수급을 말안장에 매단 후 말머리를 돌렸다.
"이랴!"
적토마는 날카롭게 울부짖은 후 네 발굽을 놓았다. 적토마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진중을 일직선으로 뚫고 달려갔다. 원소의 무리는 앞을 다투어 길을 열어주었고 적토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언덕 위로 사라졌다.
우두머리를 잃은 원소의 무리는 우왕좌왕했다. 바로 그때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언덕 위로부터 조조의 대군이 밀물처럼 쏟아져 내리며 공격해왔다.
싸움은 이미 결판난 상태였다. 원소의 무리는 수없이 많은 시체와 마필만을 남겨둔 채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한편 관우가 돌아오자 조조는 손수 영접하며 연방 탄성을 발했다.
"그대는 과연 신인(神人)이구려!"
관우는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말했다.
"신인이라니, 가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제 아우 익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백만 무리 속에서도 적장 머리 취하기를 제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합니다."
그 말에 조조의 눈이 한껏 커졌다. 그는 가슴이 서늘해져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다가 주위를 향해 말했다.
"들었느냐? 장차 장익덕이란 자를 만나면 결코 가볍게 맞서지들 말아라!"
패주하던 안량의 수하들은 원소의 본진을 만나 합류했다. 원소는 안량의 죽음을 전해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안량이 누구인가? 산동 일월보의 수호신이요, 지난 수십 년 동안 패배를 몰랐던 절세고수가 아니던가!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위에 물었다.
"긴 수염에 낯빛이 대추처럼 붉은 자라니, 대체 그 자가 누구란 말이냐?"
이때 저수가 나서며 말했다.
"용모로 미뤄볼 때 그 자가 틀림없습니다."
"그 자라니 누굴 말하는 것이냐?"
"유현덕의 아우인 관우일 것입니다."
원소는 고개를 홱 돌려 옆에 있던 유비를 돌아보았다. 유비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본 그는 대로하여 외쳤다.
"네놈이 날 속였구나! 네 아우가 안량을 죽였으니 네 목숨으로 변상해 줘야겠다!"
유비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으나 이내 냉정을 찾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공은 왜 한쪽 말만 듣고 함부로 정리를 끊으려 하십니까? 서주를 잃은 이후 오늘까지 두 아우의 생사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적과 내통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천하에는 용모가 비슷한 사람이 많은데 전하는 말만으로 그 자가 제 아우라고 확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듣고 보니 유비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잠시 생각하던 원소는 저수를 향해 꾸짖었다.
"하마터면 네 말만 듣고 실수할 뻔 했다."
그는 유비를 청해 옆자리에 앉히며 사과했다.
"이번 일은 마음에 두지 마시오."
이때 누군가 안으로 들어서며 우렁찬 음성으로 말했다.
"안량은 저의 형제나 다름없는데 어찌 원수를 갚지 않겠소이까?"
그 자는 8척에 달하는 키에 얼굴이 해태를 닮은 인물로 안량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절세고수 문추였다.
원소의 안색이 환해졌다.
"오, 그대라면 안량의 원한을 갚을 수 있을 것이오. 십만 무사를 내줄 테니 당장 황하를 건너가 조조를 잡아오시오."
저수가 다시 나서며 반대했다.
"첫 싸움에 패했으니 자중해야 합니다. 함부로 황하를 건넜다가는 전군이 다 돌아올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원소의 안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네놈은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구나! 듣기 싫다! 썩 물러가라!"
또다시 욕을 먹자 저수는 탄식하며 물러나고 말았다. 그 후로 그는 병을 핑계대고 들어앉아 버리고 말았다.
유비는 원소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유비가 대은을 입었으니 이번에 문공과 함께 출전하여 은공을 갚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원소는 기뻐하며 문추를 불러 함께 출전하도록 당부했다. 그런데 문추는 고개를 저었다.
"유공은 여러 번 패해 사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차라리 제가 무사 칠만을 거느리고 먼저 나가고, 그로 하여금 후군을 이끌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소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아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한편 조조는 관우의 무위(武威)에 감복한 나머지 만승무후(萬乘武侯)란 작위를 내려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손수 인(印)까지 새겨 하사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했다.
"공이 내 곁에 있어만 준다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겠소이다."
관우는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할 뿐이었다. 때마침 척후병으로 나갔던 무사로부터 소식이 들어왔다. 원소의 무리가 황하를 건너와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적장이 누구라고 하더냐?"
"문추입니다."
조조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백마성 일대의 양민들을 서하(西河)로 철수시킨 후 직접 무사들을 지휘하여 황하로 전진했다. 그런데 양곡과 군량을 호송하는 무사들을 전진에 배치하고 정작 본진의 무사들은 뒤로 배치했다.
여건이 의아하여 물었다.
"전진과 후진이 바뀐 것이 아닙니까?"
조조는 의미심장하게 말할 뿐이었다.
"두고 보면 알 것이네."
여건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젓는데 얼마 안 가서 앞쪽에서 요란한 함성이 울려왔다. 조조는 행군을 멈추고 명을 내렸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너라."
잠시 후 보고가 들어왔다. 문추의 무리가 쳐들어오자 양곡을 운반하던 무사들이 놀라 싸워보지도 않고 마차며 양곡을 죄다 버린 채 달아나고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