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四面楚歌)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유비는 고립되고 말았다. 장비와 약속한 대로 조조의 진영에서 불길이 오르는 것을 보고 공격을 감행했지만 그것이 조조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와아아!"
조조의 진영으로 쳐들어가는 순간 좌우로부터 함성과 함께 빗발치듯 화살이 날아왔다. 유비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뒤를 따르던 수하들이 우왕좌왕하며 무너지고 있었다. 그가 어쩔 줄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천둥 같은 고함이 들렸다.
"이놈! 유비야, 목을 내놓아라!"
놀라 고개를 돌리니 하후돈이 눈을 부릅뜬 채 달려오고 있었다. 유비는 황급히 왼쪽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후연이 성난 사자처럼 짓쳐오고 있었다.
유비는 다시 방향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가차 없이 쌍고검을 휘둘러 베어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위가 조용해졌다. 천신만고 끝에 포위망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은 피로 목욕을 한듯했고, 말도 지쳤는지 연방 거친 콧김을 토해 내고 있었다.
"이럴 수가......."
뒤를 돌아본 유비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를 따르는 수하들은 고작 30여기도 안되었던 것이다. 그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소패로 향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소패성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이르렀을 때였다.
"......!"
유비는 눈을 부릅떴다. 소패성으로부터 화염이 치솟아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패가 벌써 떨어졌단 말인가!'
그는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했지만 마냥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말머리를 돌려 서주로 향했다. 그나마 서주와 하비성으로 무사들을 분산시켜 놓은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서주로 가는 길목은 이미 조조의 대군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 하비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조조의 무리들이 요로를 막아버렸고, 곳곳에 진지를 구축해버린 것이다.
'아아! 이젠 돌아갈 곳도 없어지고 말았구나!'
유비는 절망을 느끼며 밤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으나 오늘따라 그마저도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 원공이 여의치 않으면 자신에게 오라고 했지.'
원소를 떠올리자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몇 명 안 되는 수하들과 함께 원소가 관할하고 있는 청주(靑州)를 향해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놈! 유비야! 널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산모퉁이로부터 벽력같은 호통이 울리더니 수천 명의 인마들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유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선두에서 달려오는 자는 이전(李典)이란 자였는데, 산양(山陽) 거록(巨鹿) 출신으로 조조의 수하가 된 이래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인물이었다.
유비는 이를 악물었다.
'내 더 살아 무엇 하리? 비굴하게 사느니 싸우다 죽는 게 나으리라!'
그의 수하는 고작 30여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이전과 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하지만 일단 마음을 정하자 담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 나갔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귓전을 스쳤다. 쌍고검이 검광을 뿌리는 순간 두 개의 수급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뜨거운 피가 그의 얼굴에 확 끼쳐졌다.
청운의 야망을 불태우며 검을 갈고 닦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유비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관우와 장비를 만나 도원결의를 맺었을 때는 마치 천하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는 적진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죽음의 문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날 막는 자는 죽는다!"
쌍고검이 현란한 검화를 피워낼 때마다 참혹한 비명이 터졌다. 전투에 있어서 병기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대체로 길고 무거울수록 유리한 법이다. 하지만 유비가 사용하는 쌍고검은 창이나 도(刀)에 비해 짧고 가벼웠다. 그만큼 불이익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출중한 검법으로 단점을 극복하고 있었다. 그의 검법은 일단 전개되면 대하(大河)처럼 도도하게 펼쳐졌으며, 검극으로부터 5자가 넘는 검기(劍氣)가 줄기줄기 뻗어나갔다. 조조의 무리는 현란한 검광에 눈을 뜨지 못했고, 검이 채 닿기도 전에 목이 잘려 나갔다.
얼마나 싸웠을까? 우연히 뒤를 돌아본 순간 그는 수하들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뺨으로 두 줄기 눈물을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여기서 죽으면 그야말로 개죽음이 아닌가!'
그렇다. 아무리 장렬하게 싸우다 죽는다고 한들 과연 누가 그를 위해 슬퍼하겠는가? 그의 시신은 들판에 버려져 들개나 까마귀의 밥이 될 뿐, 한때 천하를 쟁패하려던 영웅 유비를 기억할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유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이리 나약해졌단 말인가? 내게는 두 아우가 있고 가족들이 있지 않은가?'
유비의 가슴속에서 활화산과도 같은 분노가 솟구쳤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으며 앞으로 내달렸다.
히히히힝......!
말도 그의 심정을 안다는 듯 힘차게 울음소리를 내며 네 발굽을 놓았다. 유비는 쌍고검을 양손에 나누어 쥔 채 닥치는 대로 조조의 무리를 베며 달리고, 또 달렸다. 역한 피비린내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참혹한 비명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직 살아야겠다는 본능으로 혈로(血路)를 뚫고 달려갔다.
유비는 필마단기로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기적적으로 이전과 그의 수하들로부터 탈출한 것이다. 그는 달빛을 받으며 청주를 향해 달렸다.
"문을 열어라!"
청주에 당도한 그는 문루 앞에서 소리쳤다. 청주를 관장하고 있는 자는 원소의 장자인 원담(袁譚)이었다. 그는 평소 유비의 명성을 듣고 공경해오던 터라 즉각 성문을 연 후 몸소 나와 유비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