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조조의 귀에도 예형의 죽음이 전해졌다.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썩어빠진 문사의 세 치 설검(舌劍)이 스스로를 죽게 했군! 화를 자초한 것이지."
조조는 유표와는 달랐다. 그는 제아무리 현자라 해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지 못할 바에야 남에게 가는 것조차 꺼리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예형의 죽음에 애달파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예형의 일은 금방 잊어버렸다. 다만 유표가 귀순하지 않는 것에 대해 괘씸한 마음이 들어 모사들을 불러 유표를 치는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모사들 사이에서 한동안 설왕설래하더니 순욱이 의견을 피력했다.
"원소를 아직 평정하지 못했고 유비 또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 형주를 정벌하는 것은 심복(心腹)을 버리고 수족(手足)을 취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원소부터 멸하고 다음에 유비를 섬멸하면 형주쯤은 제풀에 넘어올 것입니다."
조조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옳네."
결국 유비의 위기는 또 이렇게 한숨 돌리게 되었다.
한편 동승은 유비가 떠난 후에도 밤낮으로 왕자복 등의 무리와 함께 조조를 칠 궁리를 했지만 도무지 묘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조조의 횡포와 전횡은 나날이 심해져 그의 권능은 무황을 능가하여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되어가고 있었다. 급기야 동승은 화병이 생겨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의 와병을 전해들은 유협은 걱정된 나머지 자신의 어의 길태(吉太)를 보내주었다. 길태는 당대의 명의로 오래 전부터 어의로 활약하였고 무황성의 가신들이나 호웅들의 병을 도맡아 치료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동승을 방문하여 조석으로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치료에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백약(百藥)을 써도 동승의 증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길태는 은연중 그의 병이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감히 그 까닭을 묻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길태가 하직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데 동승이 그를 불렀다.
"오늘은 달빛이 밝으니 술 생각이 나는구려. 어떻소? 오늘밤 내 술친구가 되어 주지 않겠소?"
길태는 안된다고 말하려다 내심 생각했다.
'하긴 병이 다른 곳도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이니 술로써 심화(心禍)를 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발길을 돌려 동승과 술을 마시게 되었다. 달빛 환한 정자에서 한 잔 두 잔 나눠 마시던 술이 어느덧 한 동이가 넘어가게 되었다. 갑자기 동승이 푹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길태는 황급히 그의 맥문을 짚어보았다. 다행히 무슨 병 때문이 아니라 허약해진 몸에 술기운을 못 이겨 잠이 든 것임을 알게 되자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심화가 있기에 이리도 마음의 병이 깊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동승은 무황의 인척으로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나날이 안색이 어두워지며 수척해지니 길태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허허! 인생의 참다운 행복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동승 같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면 누가 행복하단 말인가?"
그때였다.
"네 이놈! 조조야! 어딜 달아나느냐?"
엎드려 있던 동승이 갑자기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고함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길태는 깜짝 놀라 동승을 바라보았다. 동승은 잠에서 깬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길태가 아직 면전에 있는 것을 보고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
길태는 그가 잠꼬대한 것을 알았지만 짐짓 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공께서는 어찌하여 조대공을 해하려는 것이오?"
동승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아닌 게 아니라 조조에 대한 적개심에 불탄 나머지 꿈속에서 조조를 도모하는 현몽을 한 것인데 엉뚱하게 길태에게 속마음을 들킨 꼴이 된 것이었다. 그는 당황을 금치 못해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길태는 얼른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공은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비록 일개 의원에 불과하나 도리를 모르지 않습니다. 지난 며칠간 공을 모시며 연신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 까닭을 몰랐는데 이제야 짐작이 갑니다. 혹 저 같은 사람이라도 쓰임새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설령 그 일로 삼족이 멸하게 된다고 해도 의로운 일이라면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그야말로 진정이 흐르는 말이었다. 동승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그 말씀이 진심이오? 이 늙은이를 기만하는 것은 아니오?"
길태는 손가락 하나를 물어뜯어 피로 탁자 위에 글씨를 썼다. 그것은 의(義)란 글자였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진심을 믿어 주십시오."
동승은 마침내 의심을 풀고 길태의 손을 잡고 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깊이 감춰두었던 옥대 속의 밀조를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악적 조조를 도모하기 위해 우리 몇 사람이 피로 맹세했소이다. 하지만 유황숙과 마등이 떠나버리는 바람에 이제껏 아무 일도 하지 못했소이다. 그래서 마음이 답답하여 병이 난 것이오."
그의 말을 듣고 난 길태는 뜻밖에도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무 걱정 마십시오. 조조의 목숨은 제 손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동승은 놀라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길태는 더욱 자신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조조는 얼마 전부터 두풍(頭風)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한번씩 아플 때마다 격심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때마다 조조는 절 부르곤 했습니다. 조만간에 절 찾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독약을 타서 먹이면 제 아무리 조조라 한들 죽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그러니 굳이 칼에 피를 묻힐 까닭이 없다는 것입니다."
동승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듣고 보니 너무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가 지금껏 고심했던 일이 너무도 쉽게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에 그는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었다.
"오오! 내 어찌 그대를 몰랐단 말이오? 길공이야말로 하늘이 보낸 사람이외다!"
길태는 겸손하게 말했다.
"천하를 구하는 일인데 누군들 나서지 않겠습니까? 동공께서는 걱정 말고 편안히 주무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길태가 하직을 고하고 떠난 후 동승은 마음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아버렸다. 그는 기쁨을 금치 못한 나머지 잠잘 생각마저 사라져 버렸다.
'허허! 이런 기쁜 일이 생기다니. 오늘밤이야말로 내 생애 가장 즐거운 날이로다.'
그는 서실에서 내전으로 가지 않고 후당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