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안색이 변하며 물었다.
"내 주위에는 기라성 같은 인사들이 널렸는데 너는 어찌하여 인걸이 없다고 하느냐?"
예형은 뻣뻣한 태도로 반문했다.
"그럼 어디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있는지?"
조조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단칼에 예형의 목을 치고 싶었으나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순욱, 순유, 곽가, 정욱은 지모가 출중하고 지략이 무궁하니 옛적의 소하(蕭何)나 진평(陳平)이 따르지 못할 기재들이며 장요, 허저, 이전, 악진은 전설의 무쌍고수였던 잠팽(岑彭)이나 마무(馬武)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는 무인들이다. 여건과 만총 같은 사람은 재주가 넘쳐 능히 일국의 종사(從事)를 삼을 만하며, 우금과 서황은 불패무적(不敗無敵)의 선봉장들이다. 게다가 하후돈은 천고의 기재요, 조자효(曹子孝)는 세상이 다 아는 명숙이거늘 네 어찌 사람이 없다하느냐?"
예형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그의 입에서는 거침없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공의 말은 틀렸소이다. 그 인물들이라면 이 몸이 다 알고 있소이다. 순욱이란 자는 조상이나 하고 문병이나 다니게 할 사람이요, 순유는 묘지기나 할 수 있는 사람일 뿐이요, 정욱은 문이나 여닫고 집지키는 사람이요, 곽가는 글줄이나 외우고 풍월이나 읊게 할 사람이요, 장요는 북이나 치고 징소리 장단이나 맞출 사람이요, 허저는 본래 들판에서 소나 말을 키울 사람이요, 악진은 문초나 받고 문서나 읽을 사람이요, 이전은 공문이나 전하고 격문이나 띄울 심부름꾼이요, 여건은 칼이나 갈고 병기나 수리할 사람이요, 만총은 술이나 마시고 술 찌꺼기나 먹을 사람이요, 우금은 판자나 지고 담장이나 쌓을 사람이요, 서황은 소돼지나 잡을 사람이요, 하후돈은 겉보기만 그럴 듯하니 완체장군(完體將軍)이라 불러야 옳고, 조자효는 인색하기 그지없으니 요전태수(要錢太守)라 불러야 할 것이외다. 그러니 그 밖의 다른 무리들이야 다 옷걸이에 술통이요, 고기 부대에 지나지 않소이다."
조조는 뜨악하여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대로하며 물었다.
"그럼 네놈은 대체 무엇에 능하단 말이냐?"
예형의 입에서 다시 청산유수와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이 사람이야 천문지리(天文地理)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을뿐더러 삼교구류(三敎九流)의 이치를 일러 모르는 것이 없으며, 위로는 가히 임금을 요순(堯舜)이 되게 하고, 아래로는 덕을 비견하자면 공자나 안자(顔子)와 능히 짝이 될만하니 내 어찌 속된 무리들과 섞어서 논할 수 있겠소?"
조조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수하들을 몽땅 싸잡아 깎아내리는 예형의 말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충격과 분노를 느낀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장내에 있던 군웅들도 예외 없이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치를 떨었다.
"저... 저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저, 저런 미친놈!"
문득 인영이 번뜩이더니 누군가가 예형의 곁에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바로 장요였다. 장요는 허리춤의 칼을 뽑아 예형의 목에 바짝 들이대며 노성을 발했다.
"좋다! 그처럼 잘난 네놈의 목이 과연 얼마나 단단한지 한번 봐야겠다!"
그의 칼이 무지개를 그리려는 순간 조조의 일성이 떨어졌다.
"그만 두게!"
장요의 칼이 한 치를 격하고 허공에서 멈췄다. 조조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마침 내게 고수(鼓手)가 하나 필요하다. 머지않아 연회가 있을 터인즉 저 자에게 그 일을 맡겨야겠다."
조조는 비웃음이 담뿍 담긴 어조로 예형에게 물었다.
"어떠냐? 고수도 직책이라면 직책이니 맡아 보겠느냐?"
그의 속셈은 물론 고매한 척하는 예형에게 망신을 주려는 것이었지만 뜻밖에도 예형은 포권하며 말했다.
"좋소이다. 한번 해보지요."
그는 군호들의 성난 눈초리를 뒤로 하고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나간 직후 장요가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조조에게 물었다.
"어째서 저 미친놈을 살려두시는 겁니까?"
조조의 표정은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담담히 말했다.
"저놈이 그래도 헛된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천하인들은 공연한 약자를 죽였다고 비난할 걸세. 그렇게 되면 놈의 허명만 더 높여줄 뿐이지. 그래서 북치는 일을 맡겨 모욕을 주려는 것이네."
그제야 장요는 아! 하고 탄성을 발하고는 물러났다.
다음날 무황성의 대전에서 연회가 열렸다. 무수한 고수들이 연석에 좌정한 가운데 조조는 상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연회에 고(鼓) 소리가 없어야 쓰겠소? 마침 재주 있는 고수가 한 명 새로 왔다고 하니 소리 한번 들어봅시다."
그 말에 예형이 나서려는데 시종 한 사람이 그의 차림이 허술한 것을 보고 놀라 황급히 말했다.
"북을 칠 때는 새 옷을 입고 정제해야 하오."
예형은 괴이한 미소만 지어보였을 뿐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나가 북을 치기 시작했다.
둥둥둥!
그가 치는 곡은 어양삼과란 곡(曲)이었다.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낮고 둔중하게 울리던 소리는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때로는 급촉하게 빨라지면서 기기묘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
군웅들의 안색이 점차 변해갔다. 예형의 북치는 솜씨는 가히 절묘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기이한 것은 그가 치는 것은 북이었으나 군웅들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금석(金石)을 치는 소리와도 같아 북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슴을 찌르고 혼백을 쥐고 흔드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곡조에 빠져들어 어떤 자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상좌에 앉아있던 조조마저 북소리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어디까지나 예형을 모욕하기위해 만든 자리였다. 북소리가 잦아들 무렵, 간신히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예형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이놈! 이곳에서는 의관을 정제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헌옷을 입고 나왔느냐?"
북소리가 뚝 멈추었다.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예형에게 쏠렸다. 그때였다. 예형은 북채를 내던지더니 벌떡 일어나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던지는 것이 아닌가! 그 일은 순식간에 발생했으므로 말릴만한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
예형은 벌거숭이로 우뚝 선 채 좌중을 둘러보았다. 군웅들은 차마 보기 민망한 듯 모두 고개를 돌려버렸다. 예형은 괴소를 머금은 채 겨우 잠방이 하나만을 알몸 위에 걸쳤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조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꾸짖었다.
"네 이놈! 백주에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예형은 태연히 그를 마주보며 대꾸했다.
"날 보고 무례하다고 하였소?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무례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조조의 낯빛이 변하는 것을 보며 예형은 말을 이었다.
"그것은 바로 신하가 임금을 속이는 것이오. 나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청백지신을 드러냈을 뿐인데 어찌하여 무례하다는 것이오?"
조조는 뜨끔했지만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네놈이 그리 청백하다면 그럼 누가 혼탁하단 말이냐?"
예형은 손가락으로 조조를 가리키며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그야 네놈이 아니고 또 누가 있겠느냐? 너는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를 가려볼 줄 모르니 눈이 탁한 것이요, 현자들이 작성한 시서(詩書)를 읽지 않으니 입 또한 탁하며, 충언 또한 듣지 않으니 귀가 탁한 것이요, 고금에 통하지 못했으니 몸이 탁한 것이요, 천하의 영웅들을 용납하지 않으니 배가 탁한 것이요, 반역을 꿈꾸고 있으니 마음이 탁한 것이다! 더욱이 나 같은 천하의 인재를 농락하니 이는 곧 양화(陽貨)가 공자를 업신여기고 장창(臧倉)이 맹자를 훼손하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이냐? 네놈이 패업을 이루고자 한다면서 어찌 이리도 사람을 볼 줄 모른단 말이냐!"
"......!"
장내는 찬물을 뿌린 듯이 조용해졌다. 너무나 엄청난 말이었기에 군웅들 중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전전긍긍하며 조조의 눈치만 살폈다.
한참 후에야 공융이 조심스럽게 조조에게 말했다.
"저 자의 죄는 명백하여 죽음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즐거운 연회자리이니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조조가 예형을 죽일까 염려하여 한 말이었다. 기이한 것은 그 순간 조조의 안색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는 사실이었다. 조조는 조금도 노기가 깃들지 않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예형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내 네 말을 안 들은 것으로 하겠다. 하지만 큰소리친 만큼 재주가 있을 테니 그것을 증명해 주기 바란다. 널 유표에게 보낼 테니 그를 설득해보도록 해라. 만일 네가 그의 항복을 받아온다면 기꺼이 내 모사로 삼겠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격분을 참지 못해 예형의 목을 백번도 더 칠 일이었으나 조조의 행동은 범인의 예측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예형 또한 기인 중의 기인이었다. 그는 단번에 조조의 흉계를 알아차린 듯 손을 내저었다.
"싫다, 싫어! 너의 꼭두각시가 되기는 싫다! 차라리 날 죽여라!"
조조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는 가야한다. 여봐라! 말 세필을 준비해라. 양쪽에서 저 자의 팔을 끼고 유표에게 데려가도록 해라."
명이 떨어지자마자 예형은 강제로 끌려 나갔다. 조조는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주위의 모사들에게 말했다.
"성밖에 술자리를 차려놓고 저 자가 가는 길을 배웅하도록 하시오."
모사들은 그의 말뜻을 헤아리고 모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성밖에 술자리가 차려졌다. 예형이 두 명의 무사들에게 팔을 붙잡힌 채 나타나자 모사들과 군호들은 자리에 앉은 채 아무도 그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예형은 갑자기 목을 놓아 통곡했다.
순욱이 의아하여 물었다.
"너는 왜 우는 것이냐?"
예형은 힐끗 그를 보더니 말했다.
"송장들 사이를 지나는데 어찌 울지 않겠느냐?"
모사들은 일제히 분노하여 외쳤다.
"우리가 송장이라면 너는 머리가 없는 귀신이겠구나?"
예형은 또 지지 않고 응수했다.
"나는 한운야학(閑雲野鶴)과 같은 고인인데 어찌 머리가 없다 하느냐? 너희들이야말로 천하의 악적을 따르는 생각 없는 무리들이니 머리 잘린 송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이쯤 되면 입에 거품을 물일이었다. 몇몇 군웅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서며 예형을 죽이려는데 순욱이 만류하며 말했다.
"쥐새끼 같은 놈을 죽여 봤자 칼만 더럽힐 뿐이오."
예형은 한술 더 떴다.
"내가 쥐라면 너희들은 곤충보다 못한 놈들이지!"
"뭣이?"
"저, 저런 미친놈이 있나?"
중인들은 노성을 터뜨렸지만 예형은 껄껄거리며 돌아서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며칠 후 강제로 형주에 도착한 예형은 유표를 만났다. 그는 형식적으로 예를 취한 후 그의 덕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며 칭송의 말을 늘어놓았다.
유표는 바보가 아니었다. 허도에서 일어났던 소동(?)에 대해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그는 예형의 칭송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더구나 예형은 그를 한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미리 외워놓은 듯한 칭송만 줄줄이 쏟아냈던 것이다.
유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예형을 강하(江夏)에 있는 황조(黃祖)에게로 보내버렸다. 예형이 떠난 직후 수하들이 일제히 그에게 물었다.
"그 자가 주공을 조롱하였는데 어찌하여 살려 보내신 것입니까?"
유표는 웃으며 말했다.
"조조는 그가 여러 차례 자신을 모욕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 그것은 강호의 인심을 잃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지. 이번에 그를 내게 보낸 것은 남의 손을 빌려 살인을 하려는 것인데 내 어찌 수작에 넘어가겠느냐? 내가 예형을 그대로 황조에게 보낸 것은 조조에게 내 식견을 보여주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라네."
유표의 수하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럴 즈음 원소로부터 사자가 왔다. 유표는 원소의 서신을 받아 읽은 후 모사들을 소집했다.
"조조가 예형을 통해 귀순을 종용하고 원소 또한 똑같은 요구를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모사 한숭(韓崇)이 말했다.
"천하를 두 영웅이 다투고 있으니 주공께서는 그 중에서 나은 자를 좇는 것이 좋습니다."
"나은 자라 함은?"
"조조는 형세를 잘 판단할뿐더러 용병에 능합니다. 그래서 천하의 현자와 고수들이 그에게 몰려들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원소를 먼저 취한 후에는 다음 순번으로 우리를 도모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 참에 형주의 이점을 들어 먼저 조조를 좇는다면 조조도 후대할 것입니다."
유표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우선 그대가 허도로 가서 동정을 살펴보고 오시오. 그런 다음에 논의하기로 합시다."
한숭의 안색이 변했다.
"하면 지금 결정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유표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조든 원소든 믿을만한 자가 아니오. 상황을 봐가면서 결정하겠다는 것이오."
한숭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내렸다.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무릇 군신(君臣) 간에는 의리가 있는 법입니다. 제가 지금은 주공을 모시고 있으므로 끓는 물이나 불길 속이라도 뛰어들라시면 뛰어들 것입니다. 만일 주공께서 진심으로 위로는 무황폐하와 아래로는 조대공을 받들겠다면 절 허도로 보내십시오. 하지만 한 점의 의혹이라도 있어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면 그만두십시오. 제가 허도에서 폐하께 직책이라도 받게 되면 그때부터는 폐하의 신하가 되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다시는 주공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유표는 불쾌한 빛을 띄우며 말했다.
"우선 가서 동정이나 살피고 오시오. 내게 다 생각이 있어 그러는 것이오."
한숭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 날로 허도를 향해 떠났다. 그가 허도에 도착해 조조를 알현하자 조조는 그를 환대하며 후한 봉록을 하사했다.
봉록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조조가 한숭에게 봉록을 베풀자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금치 못했다. 그것을 본 순욱이 조조에게 물었다.
"한숭은 그저 동정을 살피러 온 것인데 어찌하여 봉록을 내리시는 겁니까? 게다가 예형을 유표에게 보내놓고 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조조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예형이 날 모욕하기에 남의 손을 빌려 죽이려 한 것일 뿐이네. 그가 무슨 소임을 수행하겠나? 그래서 묻지 않은 것일세."
순욱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주공의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조조는 한숭을 부중에서 며칠동안 머물게 한 후 형주로 돌아가 유표에게 귀순을 종용하도록 지시했다. 한숭은 공손히 절을 한 후 형주로 돌아갔다. 그는 유표를 만나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조대공이야말로 천하의 영웅이며 장차 대업을 이룩하실 분입니다. 공께서는 그분께 의탁하시는 것만이 살 길입니다. 차제에 적자(嫡子)를 그분께 보내 앞날을 담보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표는 격분하여 버럭 외쳤다.
"네놈이 어찌 며칠 만에 변절을 하였단 말이냐!"
한숭은 조금도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공께서 절 버리신 것이지, 제가 공을 버린 것이 아니올시다."
"무, 무엇이라고? 이런 발칙한......."
유표가 기가 막혀 발을 구르는데 옆에 있던 괴양이 넌지시 귀띔을 했다.
"한숭이 허도로 떠나기 전에 미리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주공께서도 기억나실 겁니다."
유표는 결단력은 약하나 비교적 심기가 깊은 위인이었다. 그는 한숭을 죽이면 조조와 영영 원수를 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설사 죽일 때 죽이더라도 당장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좋다. 내 그대의 말을 참작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는 한숭을 이대로 용서할 마음은 없었으므로 수하들에게 지시하여 옥에 가두도록 조치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예형에 관한 소식이 들려왔다.
"황조가 예형을 죽였다고 합니다."
유표는 소식을 갖고 온 수하에게 물었다.
"어떻게 죽였다고 하느냐?"
"황조와 예형이 술을 마시던 중 둘 다 취했다고 합니다. 황조가 취중에 예형에게 '허도에는 대체 어떤 자들이 있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형이 하는 말이 '큰 아이는 공융이요, 작은 아이는 양덕조(楊德祖)인데 그 두 사람을 빼고는 인물이라 할만한 자들이 없소!' 하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흠, 그랬더니?"
"황조가 '그럼 나 같은 사람은 어떻소?' 하고 물었더니 예형이 하는 말이 '그대야 사당의 귀신으로 번번이 제사는 받아먹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귀신이지!' 하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유표는 그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정말 대단하군!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황조가 대로하여 예형의 목을 베어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형은 목이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그치지 않고 황조를 욕했다고 합니다."
유표는 그만 탄식하고 말았다.
"아아! 골기(骨氣) 있는 당대의 명인이 때를 잘못 만나 죽고 말았구나!"
예형은 그를 찾아와 흰소리를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불쾌감을 금치 못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외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막상 예형의 죽음을 전해 듣자 그는 측은지심이 들었다. 그는 애석한 마음이 들어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잘 장사 지내주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