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전일에 그와 원수진 적이 있는데 그가 어찌 날 용납하겠소?"
가후는 자신 있게 말했다.
"조조는 결코 사소한 일에 연연할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를 따라야만할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세 가지 이유?"
"우선 그가 무황성을 장악하고 있으니 그를 따르는 것은 곧 무황을 섬기는 일과도 같으니 명분이 선다는 것입니다."
장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맞는 말이지."
"다음으로 원소는 강성하므로 우리가 그를 따르게 되면 업신여겨 중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조조는 약하지만 우리를 얻게 되면 기쁜 나머지 융숭한 대접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수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졌다.
"마지막은 조조가 오래전부터 흉중에 패업(?業)의 뜻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않고 덕을 사해에 떨치려할뿐더러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소보다는 그를 좇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장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의 말이 백번 지당하오. 내 유엽을 만나보겠소이다."
유엽은 장수를 만나자 조조에 대한 칭송을 길게 늘어놓은 연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대공께서 과거의 일을 마음에 담고 있다면 무엇 하러 장대공과 손을 잡으려 하시겠습니까? 지난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장수는 안색을 활짝 펴며 말했다.
"내 조대공의 진의를 잠시나마 의심했었소.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모든 의혹이 안개 걷히듯 사라졌소이다. 그럼 곧 조대공을 뵈러 가겠소이다."
며칠 후 장수는 가후와 함께 허도로 향했다. 허도에 도착하여 조조의 부중을 방문하고 보니 조조는 단상에 앉아 있고 그는 단하에 서게 되었다.
장수는 허도에 들어설 때부터 조조의 진영이 흐트러짐이 없이 엄밀한 것을 보고 이미 기가 꺾인 상태였다. 그는 단하에서 무릎 꿇고 절을 했다.
"신, 조대공을 알현하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단상에 좌정하고 있던 조조는 몸을 일으키더니 몸소 단하로 내려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잘 오셨소. 이전의 불미스런 일들은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소이다."
장수는 그의 부드러운 태도에 긴장됐던 마음이 봄눈 녹듯이 스르르 풀어지고 말았다.
조조는 상황에 따라 사람을 강하게 압박하기도 하고 혹은 부드럽게 끌어안기도 하는 임기응변에 능한 인물이었다. 처음 그는 장수에게 위압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기선을 제압해 버렸다. 이어 위축되어 있던 상대를 부드럽게 포용함으로써 완전한 굴복을 이끌어낸 것이다.
조조는 장수에게 직책을 내린 후 그에게 유표를 설득하도록 청했다. 그런데 가후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유표는 그리 쉽게 넘어올 사람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역효과를 낼지도 모릅니다. 그는 본래부터 천하의 명사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인품과 문명(文名)이 널리 알려진 자를 보내 설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말에 조조는 순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누구를 보내면 좋겠소?"
순유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공융이 적임자인 것 같습니다."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대가 알아서 하시오."
순유가 공융에게 그 말을 전하니 공융은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그 일이라면 한 분을 천거하겠소이다. 나보다 재주가 열배나 더 많은 분이외다."
"어느 분이기에 그리 칭찬을 하는 것이오?"
"지금은 비록 초야에 묻혀 있지만 오래 전부터 폐하께 천거하려 했소이다. 그 분이라면 능히 소임을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소이다. 바로 예형이란 분이오."
순유는 그의 말을 조조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조조는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예형이라고? 금시초문이군. 한낱 무명인이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그래봐야 일개 책벌레가 아니겠소?"
순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공융이 천거한 자이니 한번 믿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조는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허락했다. 다음날 아침 공융은 무황 유협을 알현하여 예형을 소개하며 무황성의 앞날을 위해 중용해 줄 것을 품했다.
유협은 교지를 내려 예형을 불러들였다. 예형은 세상 돌아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초야에 묻혀 사는 은자(隱者)로, 천하 없는 부귀영화로 유혹한다고 해도 가볍게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무황의 교지를 받은 그는 허도로 올라오게 되었다.
유협은 예형을 만나보았으나 초면에 그의 사람됨이나 학문의 깊이를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조조를 만나도록 당부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무황성의 모든 인사는 조조가 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형은 조조의 부중으로 찾아갔다. 조조는 단상에 앉아 예형이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예형은 꼿꼿한 자세로 걸어 들어와 두 손을 이마 위로 들어올려 가볍게 예를 표할 뿐, 조금도 공경하는 낯빛이 아니었다. 그것을 본 조조의 미간에 불쾌한 빛이 역력히 드러났다.
조조는 처음부터 예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학문이 높고 대단한 재주를 지녔다한들 일개 은사에 불과하지 않은가. 당금 무림을 장악하고 있는 자신에게도 그만한 인사는 구름같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예형의 깡마른 외모와 뻣뻣한 태도는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예형이 예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콧등으로 응답했을 뿐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예형이 어찌 그 사실을 모르겠는가? 불현듯 그는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더니 탄식했다.
"아아! 천하가 넓다한들 인걸은 하나도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