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유대는 왕충이 사로잡힌 후 더욱 겁을 집어먹고 진영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려하지 않았다. 그는 장비가 연일 찾아와 욕설을 퍼붓고 싸움을 걸어와도 응하려 들지 않았다. 더구나 상대가 소문난 고수인 장비라는 것을 알고는 더욱 조심했다.
장비는 수일이 지나도 유대의 코빼기초차 보지 못하자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상대의 진영으로 달려 들어가 풍비박산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유비에게 단단히 약속을 한 터라 속을 부글거리던 끝에 한 가지 계책이 떠올랐다.
그는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본래 장비는 술만 마시면 주사를 부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을 잘 아는 수하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장비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진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수하들은 모두 그를 피해 숨기에 바빴지만 그 중 몇 명이 걸려들고 말았다. 장비는 그들을 잡아 심하게 매질한 후 가두어버렸다.
"끄윽! 내 오늘밤 이경에 유대 놈을 죽이러 갈 것이다! 그 때 네놈들의 목을 베어 군령의 표본을 삼을 것이니 그리 알거라! 끄으윽!"
실상 장비의 주량은 엄청난 것으로 그 정도 마시고 취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취한 척하여 수하들을 속인 것이었다. 그러나 장비의 속셈을 모르는 수하들은 목이 떨어질까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다.
그날 오후 장비는 몰래 사람을 보내 갇혀있던 수하들이 달아나도록 했다. 그러자 달아난 자들은 유대의 진영으로 달려가 장비가 이경 무렵에 공격할 것이라고 밀고했다.
유대는 혹시나 함정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밀고하러온 자들의 언행이 실감나는데다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하긴 장비란 놈은 용맹만 뛰어났지 머리는 없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네놈을 처치해 주마!'
그는 머리를 쓴답시고 공성계(空城計)를 취하기로 했다. 먼저 진영을 텅 비워두고 수하들을 진 밖에 매복시켜둔 후 장비가 쳐들어오면 일시에 밖에서 공격하여 몰살시킨다는 작전이었다.
한편 그날 밤 장비는 수하들을 3로로 나누었다. 그 중 중로의 30인 무사들로 하여금 유대의 진영으로 뛰어 들어가 불을 지르게 했다. 나머지 양로의 수하들은 진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유대가 자신의 진영으로 들이치면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또한 자신은 유대가 달아날 것을 대비하여 퇴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불이야! 불!"
유대의 진영으로 뛰어든 장비의 수하들은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다. 진영에서 불길이 솟구치자 유대는 공격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이 함정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이 막 진영으로 쳐들어갔을 때, 좌우로부터 요란한 함성과 함께 빗발치듯 화살이 날아왔다.
어두운 밤이라 상대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기만할 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속속 쓰러지고 말았다.
'함정에 빠졌구나!'
유대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몇 안 되는 수하들과 함께 혈로(血路)를 뚫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그는 장비를 만나고 말았다.
"껄껄껄! 이놈 유대야! 어딜 그리 급히 달아나느냐?"
밤송이 같은 턱수염을 기른 장비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며 대소를 터뜨리자 유대는 혼백이 달아나고 말았다. 장비는 별반 힘들이지 않고 1합 만에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 사로잡았다.
우두머리가 붙잡히자 유대의 수하들은 일제히 병기를 내던지며 항복해 버렸다. 장비는 사람을 서주로 보내 유대를 사로잡았다는 보고를 올렸다.
소식을 접한 유비는 기뻐하며 말했다.
"익덕이 본래는 덤벙댔는데 이제 꾀를 쓸 줄도 알게 됐으니 더 이상 근심이 없겠네!"
그 말에 관우도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장비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유비는 직접 마중을 나갔다. 장비는 그를 보고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형님은 나더러 성미가 고약하다고 말했지만 그래, 지금은 어떻소?"
유비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그야 내가 말로 자네를 격동시키지 않았으면 이렇듯 꾀를 내었겠는가?"
장비는 껄껄 웃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유비는 저만치 뒤에서 유대가 포승에 결박되어 끌려오는 것을 보고 말에서 내리더니 손수 그의 결박을 풀어주며 말했다.
"내 아우 익덕이 무례하게 굴었구려. 부디 용서해 주시구려."
유대는 뜻밖에도 그가 정중하게 대해주자 어리둥절한 느낌이었다. 유비는 그를 서주로 데려간 후 왕충과 함께 대전에서 융숭히 대접하며 말했다.
"이번 일에는 오해가 있었던 것 같소이다. 내가 전에 차주를 죽인 것은 그가 날 모해하려했기에 어쩔 수 없어 그리했던 것이오. 조대공께서는 그 일로 내가 배신한 것으로 생각하고 두 분을 보낸 것 같소이다. 그러나 이 유비는 조대공의 은덕을 입은 사람으로 어떻게 하면 후의에 보답할까 고민해온 사람이외다. 그러니 두 분께서 허도로 돌아가 이 유비를 위해 잘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유대와 왕충은 죽은 목숨인줄로만 알았는데 이게 웬일이냐 싶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공께서 저희들을 죽이지 않고 은혜를 베풀었는데 마땅히 조대공께 잘 말씀드릴 것입니다. 이는 저희들의 식솔들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소이다."
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이 유비, 일생 그 은덕 잊지 않겠습니다."
다음 날 유비는 그들을 풀어주며 그들이 데려온 무사들도 모두 함께 내주었다. 두 사람은 감읍하며 허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그들이 서주로부터 10여 리쯤 갔을 때였다.
"이놈! 게 섰지 못하겠느냐!"
돌연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일단의 무리들이 추격해오는 것이 아닌가?
유대와 왕충이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장비가 무사들을 이끌고 와 그들을 포위해버렸다. 장비는 눈썹을 곤두세우며 벼락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형님은 도무지 사람이 좋아 탈이란 말이야! 그래, 잡았던 포로를 내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장비는 창을 꼬나 잡더니 유대와 왕충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대와 왕충은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벌벌 떨기만 할 뿐,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두 사람이 이젠 죽었구나 하고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익덕아! 무례히 굴지 마라!"
돌연 누군가의 일성이 울리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이 놀라 눈을 뜨자 저만치서 관우가 나는 듯이 말을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한 가닥 삶의 희망이 솟아나는 듯했다.
관우는 다가오더니 장비를 향해 꾸짖는 것이었다.
"익덕아! 형님께서 두 분을 놓아주셨거늘 네 어찌 장령을 어기려 드는 것이냐?"
장비는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흥! 이번에 저 자들을 놓아준다 해도 다음에 다시 올 거요. 그럴 바에야 아예 죽여 버리는 게 낫지 않겠소?"
관우는 힐끗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유대와 왕충은 그의 눈길을 받자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애원의 눈길을 보냈다. 관우는 다시 장비를 향해 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들이 다시 오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유대와 왕충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조대공께서 저희들의 삼족을 멸하신다 해도 다시 오지 않을 테니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 장비가 눈알을 부라리며 외쳤다.
"설사 조조란 놈이 온다고 해도 누가 겁낼 줄 아느냐? 그땐 이 장비 어르신이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 이번엔 두 분 형님의 얼굴을 봐서 네놈들의 목은 붙여둘 테니 그리 알도록 해라!"
유대와 왕충은 장비의 호통에 그만 바짓가랑이를 적시고 말았다. 그들은 고개를 조아려 감사드린 후 황급히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관우와 장비는 마주보며 껄껄 웃은 후 서주로 돌아갔다. 기실 이번 일은 유대와 왕충이 딴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으려고 두 사람이 짜고 연극을 한 것이었다.
한편 유비는 두 아우로부터 보고받은 후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조조는 다시 올 것이다."
비록 교묘한 계책으로 조조에게서 5만의 무사들을 빼내왔고 서주를 탈환하긴 했지만 아직 그의 힘은 조조에 비한다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했다. 만일 조조가 대군을 일으킨다면 그로서는 싸워 이길 가능성이 전무한 것이었다.
손건이 계책을 내놓았다.
"서주는 사방이 트여있어 공격받기는 쉬워도 방비하기는 어려운 곳입니다. 그러니 소패와 하비에 무사들을 나누어 기각지세를 이루어 방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소이다."
유비는 관우로 하여금 하비를 지키게 하며 자신의 부인들과 식솔들도 함께 데려가도록 했다. 아울러 손건, 간옹, 미방, 미축으로는 서주를 방비하게 하고 자신은 장비와 함께 소패를 맡기로 했다.
유비는 이제 최후의 항전을 다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 조조가 대군을 몰고 달려온다면 죽음을 불사하고 항전해야겠지만 5만에 불과한 무사들로 조조와 맞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저 운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는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