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눈을 반개한 채 생각에 잠겼다. 한편 유비는 공손찬의 죽음에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 사람의 생사에 대해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공손찬의 예하에 있던 청년 고수 조자룡이었다.
그는 조조를 힐끗 살펴보았다. 조조의 안색이 자꾸만 변하는 것을 보고 대충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만총의 말대로 원소와 원술이 합친다면 그로서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출군하기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동안 그가 무황성에서 벌인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허도를 비우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호굴로부터 몸을 빼낼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지금이 아니고 또 언제 결행하겠는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조조에게 말했다.
"원술이 원소에게 가려면 서주를 지나야 합니다. 저에게 무사들을 내주신다면 중간에서 가로막고 원술을 치겠습니다."
조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그럼 내일 폐하께 말씀드리고 출병하도록 하시오."
조조로서는 유비가 대신 나서겠다니 일거에 고민이 해결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유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날, 유비는 유협을 알현하여 출정의 양해를 구한 후 다시 조조를 찾아갔다. 조조는 그에게 무사 5만을 내주어 통솔하도록 하고 직계수하인 주령(朱靈)과 노소(路昭)를 동행토록 했다.
유비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식솔들을 재촉하여 조조가 내준 무사들을 거느리고 무황성을 떠났다.
그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동승이 10리 밖까지 배웅을 나왔다. 동승으로서는 그가 이 시점에 무황성을 떠나는 것이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었다. 유비는 그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공께서는 잠시만 참으십시오. 이번 길에는 뜻이 있으니 반드시 폐하의 은덕에 보답할 것입니다."
동승은 절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공께서는 부디 유념하시어 폐하의 밀조를 잊지 않았으면 하오."
유비는 엄숙하게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요."
무황성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관우와 장비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유비에게 물었다.
"형님, 어찌하여 이토록 서두르시는 겁니까?"
유비는 힐끗 무황성을 돌아다보았다. 저만치 멀어진 무황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회한이 어렸다.
"그동안의 나는 조롱 속에 갇힌 새요, 그물 속에 든 물고기 신세나 다름없었네. 하지만 이번 길로 말미암아 고기가 바다로 들어가고 새가 창공을 마음껏 날게 됐으니 어찌하여 서두르지 않겠는가?"
"아!"
관우와 장비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탄성을 발했다. 유비는 두 사람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네들은 주령과 노소를 독촉하여 행군의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이도록 하게."
관우와 장비는 밝은 신색으로 복명했다.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형님!"
조조로부터 제공받은 5만 명에 달하는 인마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편, 곽가와 정욱은 지방에 나갔다가 무황성으로 돌아왔는데 유비가 출군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곧바로 조조에게 달려갔다.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유비에게 무사를 주어 출군하게 하셨습니까?"
곽가의 말에 조조는 담담하게 말했다.
"원술의 길을 끊으려고 내가 시켰네."
그 말에 정욱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전일에 유비에게 예주를 담당케 하셨을 때도 저희들은 그를 죽이라고 간했지만 주공께서는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사들까지 내주었으니 그야말로 용을 바다에 넣어주고 범을 산으로 돌려보내신 격입니다. 향후 다시 그를 잡으려 해도 결코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조조의 안색이 변하자 곽가가 다시 음성을 높였다.
"설사 유비를 죽이지는 않는다 해도 이대로 떠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옛말에도 적을 놓아주는 것은 하루면 되지만 근심은 만세(萬世)에 화근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공께서는 깊이 헤아리셔야 할 것입니다."
마침내 조조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그는 즉각 허저를 불렀다.
"자네는 지금 당장 무사 오백을 이끌고 달려가 유비더러 회군하라고 전하게!"
허저는 복명하고 유비를 회군시키기 위해 무황성을 출발했다.
일로 행군하던 유비는 간간이 뒤를 돌아보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 지평선으로부터 황진이 일어나는 것이 발견되었다.
"조조의 수하가 쫓아오는 것이 틀림없군."
그는 행군을 멈추게 한 후 행렬의 뒤로 나갔다. 그는 관우, 장비로 하여금 자신의 양옆에 서게 한 후 군마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허저가 당도해 보니 5만 명이 넘는 무사들의 진용이 위용이 만장할뿐더러 진세 또한 허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엄중했다.
"공은 무슨 일로 오셨소?"
유비가 그를 맞이하며 물었다. 허저는 공손히 예를 취한 후 말했다.
"주공께서 급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회군하라고 명하셨소이다. 그러니 지금 즉시 허도로 돌아가십시오."
유비는 고개 들어 잠시 하늘을 우러러보더니 이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전장에서는 장수가 군(君)의 명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있소이다. 내 친히 폐하께 상주하였고 또한 조대공의 명을 받아 병력까지 넘겨받았소이다. 이제 와서 새삼 의논할 일이 무에 있겠소? 공은 돌아가 내 말을 전해 주시구려."
허저는 난처해졌다. 고작 5백 명의 무사들밖에 거느리지 않고 온 터라 회군하라고 유비를 강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주공께서는 이 자와 교분이 각별했고 나더러 죽이라는 명을 내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일단 돌아가 복명하고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겠구나.'
그는 체념하고 유비에게 포권지례를 취하며 말했다.
"그럼 주공께 그렇게 전하겠소이다."
허저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무황성으로 돌아갔다. 그는 조조에게 유비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안 돌아오겠다고 했단 말이지?"
조조의 안색은 찜찜하게 변했다. 정욱과 곽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 마디씩 했다.
"유비가 회군하지 않는 것을 보면 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조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지금 와서 후회한들 또 어쩐단 말인가. 그는 눈을 뜨며 담담히 말했다.
"내가 주령과 노소를 딸려 보냈으니 그가 감히 배신하지는 못할 것이오. 더구나 이미 떠났는데 후회해서 뭐하겠소? 섣불리 뒤를 쫓다가는 천하인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오. 잠시 놓아두고 봅시다. 그래봐야 언젠가는 다시 내 손에 들게 되어있으니까."
조조가 범한 이 한번의 실수로 인해 향후 무림의 정국은 반전(反轉)에 반전을 거듭하게 된다. 결국 한 마리의 용을 바다로 보낸 셈이요, 사나운 범을 산에 풀어줄 격이 된 것이다. 물론 조조는 심중으로 유비쯤이야 하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은 두고 볼 일이었다.
한편 마등은 조조를 치기로 맹세한 유비가 떠나자 더 이상 무황성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변경으로부터 급보가 날아오기도 한 터라 그 날로 허도를 떠나 자신의 영지인 서량으로 돌아가 버렸다.
"어서 오십시오. 유공."
차주(車胄)는 유비를 공손히 맞아들였다. 그는 조조의 명을 받고 서주를 다스리고 있던 인물이었다. 유비가 5만여 무사들을 이끌고 서주로 돌아오자 허도에서의 일을 알지 못했던 그는 아무 의심도 없이 유비를 맞아들인 것이다.
그는 연회를 베풀어 유비 일행을 성대하게 환대했다. 연회가 끝날 무렵 미축과 손건이 찾아와 문안을 드렸다. 유비는 두 사람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 식솔들을 만나보고는 그들이 무사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음 날 유비는 사람을 보내 원술의 동태를 알아보도록 했다. 정탐 나갔던 자가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원술은 사치가 극에 달할뿐더러 수하들을 돌보지 않아 많은 무사들이 이탈했습니다. 그들 중 뇌박(雷薄)과 진란(陣蘭)은 숭산(崇山)으로 가버렸습니다. 원술은 상황이 악화되자 원소에게 제호를 물려주려고 사람을 보냈는데 원소가 이를 수락하고 원술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술은 재물을 몽땅 싣고 수춘을 떠났습니다. 조만간 서주를 지난다고 합니다."
"흠, 그럼 미리 길목을 차단해야겠군."
유비는 관우, 장비, 주령, 노소와 함께 5만의 무사들을 이끌고 곧바로 출군했다.
얼마 후 그는 원술의 선봉장인 기령과 만나게 되었다. 유비가 미처 명을 내리기도 전에 장비가 앞으로 나섰다.
"오냐, 근질근질하던 차에 잘 만났다! 어디 몸 좀 풀어보자!"
그렇지 않아도 오랫동안 싸움을 하지 않아 몸이 찌뿌듯하던 장비라 일언제하고 장팔사모를 움켜쥔 채 달려 나갔다.
두 사람은 곧바로 격전을 벌였다.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10합 가량 싸웠을까?
"뒈져라!"
쩌렁쩌렁한 호통소리와 함께 장비의 장팔사모가 기령을 찔렀다. 기령을 비명과 함께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 장비는 말로 기령을 짓밟아 버린 후 곧바로 적진을 향해 뛰어 들었다.
"공격하라!"
유비의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우두머리를 잃은 원술의 무사들은 맞설 엄두도 못낸 채 사방으로 흩어지며 달아나기에 바빴다. 첫 번째 싸움은 유비의 대승이었다.
얼마 후 이번에는 원술이 몸소 대군을 이끌고 달려왔다. 유비는 침착하게 적의 진세를 파악한 후 무사들을 3대로 나누었다. 자신은 중군을 맡고 관우와 장비로 하여금 우군을, 주령과 노소는 좌군을 맡게 했다.
그는 앞으로 나가다 맞은편에 원술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음성을 높여 꾸짖었다.
"반역자 원술은 듣거라! 본인이 무황폐하의 명을 받들어 널 응징하러 왔다! 지금이라도 엎드려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즉각 복명하도록 하라!"
그 말에 원술이 앞으로 나서며 욕설로 응대했다.
"천한 놈 유비야! 본좌를 어찌 보고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내 당장 네놈의 목을 쳐주마!"
그렇지 않아도 심정이 꼬일 대로 꼬인 원술은 평소 같잖게만 여기던 유비가 호통 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수하들에게 총공격을 펼치도록 했다.
유비는 침착했다. 그는 일단 무사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것을 본 원술은 기고만장하여 달려들었다. 그때 유비의 지시를 받은 무사들이 좌우에서 일시에 몰아치니 원술의 대군은 우왕좌왕하고 말았다. 특히 관우와 장비가 그 동안의 답답함을 한풀이라도 하듯 펄펄 날며 그의 진중을 휘젓고 다니니 도처에 시신이 산처럼 쌓이고 피가 내를 이룰 지경이었다.
전략도 전략이었지만 처음부터 원술의 수하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유비의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고 만 것이었다.
원술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얼마 안 되는 수하들과 함께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비운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숭산으로 떠나버렸던 뇌박과 진란이 갑자기 나타나 기습을 가하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식량과 재물을 실은 마차를 거의 다 빼앗기고 말았다.
원소에게 가려면 서주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불가능해져 버렸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수춘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어디선가 몰려온 도적들이 패잔병이 된 그의 대열을 공격했다. 이제 한낱 도적 떼조차 막아낼 힘이 없는 그는 죽기로 달아나 간신히 강정(江亭)이란 곳에 이르게 되었다.
그를 따르는 무사들은 고작 천여 명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나마 부상이 심하거나 늙고 약한 자들뿐이었다. 때마침 삼복(三伏)인지라 푹푹 찌는 무더위에 먹을 것마저 부족했다.
겨우 남아있는 보리 30곡을 수하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니 그는 물론 식솔들이 먹을 것이 없었다. 더위에 지치고 굶주림에 시달리니 죽어가는 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갔다.
실로 비참지경이었다. 한때 무림황제를 자칭하며 온갖 사치와 향락을 일삼던 원술은 자신의 처지를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비정한 것이었다.
수하들이 보리로 밥을 지어 바쳤지만 그는 험한 식사가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가 않았다. 며칠을 제대로 먹지 못한 그는 점점 더 말라만 갔다.
어디 그 뿐인가?
밤이면 발작이 심해졌다. 백자천경 상의 신공을 무리하게 연마하다 주화입마에 빠진 후로 매일 밤 자시(子時)만 되면 기혈이 역류하곤 하던 것이 이제는 수시로 찾아오고 있었다.
"으으ㆍㆍㆍ 괴롭구나. 차라리ㆍㆍㆍ 죽고만 싶구나."
원술은 고통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데굴데굴 굴렀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날이 밝자 그는 수하를 불렀다.
"목이 타는 구나. 꿀물 좀 가져오너라."
그러자 수하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그는 한심하다는 듯이 원술을 바라보며 말했다.
"있는 건 핏물밖에 없는데 어디 가서 꿀물을 구한단 말입니까?"
"뭐, 뭐라고? 이, 이놈이ㆍㆍㆍ 누구 안전이라고 감히ㆍㆍㆍ 으아악!"
원술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피를 한 말이나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천하의 호웅 원술이 한낱 수하의 조롱어린 한 마디에 숨이 넘어가고 만 것이다. 실상 그가 이토록 허무하게 죽은 이유는 체력이 바닥난 데다 간신히 가라앉혀 놓았던 기혈이 한꺼번에 역류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