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은 봄이다. 채마밭의 가지런한 골을 따라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피어오르며 대지(大地)의 신선한 숨결을 느끼게 한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손길은 변함없는 대지의 마음을 닮아서인지 여유 있고 따뜻해 보인다. 채마밭을 갈고 손수 구한 씨를 뿌린 후 물을 주고 있는 농부의 모습에서는 한 점 사심(私心)도 없이 그저 무욕(無慾)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ㆍㆍㆍㆍㆍㆍ."
관우는 며칠째 채마밭에서 떠날 줄 모르는 농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농부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채마 가꾸기에만 열중이었다.
관우의 미간이 점차 찌푸려졌다.
"젠장, 큰형님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요?"
짜증 섞인 음성이 후원을 흔들었다. 관우는 고개를 돌렸다. 장비가 송충이 같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못마땅한 듯 농부를 노려보고 있었다. 관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궁금하면 직접 물어 보려무나."
장비는 못할 게 뭐있냐는 듯 성큼성큼 채마밭을 향해 걸어갔다.
"형님! 대체 뭐하는 거요?"
농부가 허리를 펴며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 밴 땀방울을 손등으로 문지르는 바람에 그의 얼굴에 흙이 묻고 있었다.
"보면 모르느냐? 채마밭을 가꾸는 중이다."
장비의 눈썹이 곤두섰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소? 글쎄 갑자기 웬 채마밭이냐, 이 말이오."
장비의 얼굴은 불만과 짜증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농부-유비는 힐끗 저만치 서있는 관우를 일별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뭐, 뭐요?"
장비가 막 발작을 하려는데 어느새 다가왔는지 관우가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가자, 아우."
"가긴 어딜ㆍㆍㆍㆍㆍㆍ."
장비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관우가 손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어깨가 저리는 바람에 그는 할 수 없이 관우를 따라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형님께서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후원을 빠져나오며 관우가 한 말이었다. 장비도 바보는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유비가 한가롭게 채마밭을 가꾸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기는 했다. 요즘처럼 무황성에 살벌한 기류가 흐를 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농부 흉내를 내겠는가 말이다.
유비는 그 후로도 내내 채마밭에서 살다시피 했다. 관우도 장비도 더 이상 그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답답한 심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청운의 야망을 품고 그들 3형제가 강호에 나온 지도 어언 10년을 훌쩍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들의 처지는 고작해야 조조의 식객(食客)으로 전락해 있을 뿐이었다. 광활한 중원천하를 질타하며 원대한 꿈을 이루리라는 도원의 맹세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허저와 장요가 수십 명의 무사들과 함께 유비를 찾아왔다. 허저는 채마밭에서 농부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일하고 있는 유비를 보고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반면 유비는 허저와 장요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여긴ㆍㆍㆍ 웬일들이시오?"
"주공께서 부르시오. 지금 즉시 채비를 차리시오."
유비의 안색이 변했다.
"무슨 일이기에 허공과 장공을 함께 보내신 건지요?"
허저는 눈살을 찌푸렸다.
"난 모르오. 그저 데리고 오라는 명을 받았을 뿐이오."
유비는 수십 명의 무사들이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오금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무황성에 온 이후 그의 신분은 황숙으로 격상되었고 그때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그가 걱정하는 것은 조조의 반응이었다.
조조는 그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의식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조야말로 당금 무림의 실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동승과 함께 조조를 치기로 하고 비밀리에 연명부까지 작성하지 않았던가.
'혹 그 일이 새어나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빨리 갑시다."
허저가 재촉하는 바람에 유비는 그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관우와 장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조조는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요즘 집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고 들었소만?"
유비는 그 말에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일을 벌이다니? 그럼 역시? 유비는 안색이 흙빛이 된 채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조조는 그의 손을 잡고 후원으로 향하며 말했다.
"채마 가꾸기가 그리 수월치는 않을 텐데, 어떻소?"
유비는 그 말에 비로소 가슴이 놓였다.
"할 일이 없어 그저 소일삼아 하는 것입니다."
"소일삼아 농사를 한다? 하하! 그래 할만하오?"
조조는 기분이 좋은 듯 너털웃음을 쳤다. 유비는 고개 숙이며 말했다.
"기껏해야 농군 흉내를 낼 뿐이지요. 어디 제대로 하기야 하겠습니까?"
대꾸하면서도 그는 가슴이 섬뜩해짐을 금치 못했다. 조조가 자신이 채마를 가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은연중 사람을 풀어 감시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두 사람은 후원으로 들어섰다. 조조는 후원 한가운데 있는 정자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마침 매화가지에 열매가 파랗게 맺힌 것을 보고 지난 해 장수를 치러갔을 때가 떠올랐지 뭐요. 행군 중에 물이 떨어져 수하들이 갈증을 호소하는데 내가 어떻게 조치했는지 아시오?"
"ㆍㆍㆍㆍㆍㆍ?"
"내가 채찍으로 맞은편 숲을 가리키며 '저기 매화나무 숲이 있다!' 하고 말했소이다. 그랬더니 수하들은 모두 입안에 침이 돌면서 갈증을 떨쳐냈지 뭐요. 하하하! 청매(靑梅)를 보니 그때 일이 떠올라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지. 마침 빚어놓은 술도 알맞게 익었기에 정자에서 술이나 한 잔 하려고 부른 것이오."
유비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