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 어찌하여 이리도 깊이 잠이 드셨소이까?"
동승은 문득 들려온 소리에 잠이 깨었다. 이미 해가 높이 떴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맞은편에 왕자복(王子服)이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동승은 본능적으로 밀조부터 찾아보았으나 탁자 위에 있어야할 밀조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데 왕자복이 딱딱하게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이걸 찾는 것이오?"
동승은 그가 소매 속에서 무황의 밀조를 꺼내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그, 그걸 어떻게?"
왕자복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갈 태세를 취하며 외치는 것이었다.
"네가 감히 조대공을 죽이려 하는구나! 내 가서 고해야겠다!"
동승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왕자복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공이 그리하면 무황성은 영영 멸망하고 말 것이오. 제발... 내 말을 들어보시오."
왕자복은 갑자기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내 농담을 한 것이오. 나 역시 대대로 무황성의 녹을 먹은 가신이거늘 어찌 그런 불충한 일을 저지른단 말이오? 청컨대 공의 한 팔이 되어 함께 간적을 처단하게 해주시오."
동승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공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천군을 얻은 듯하오이다."
왕자복은 비로소 엄숙한 신색으로 말했다.
"그야 당연한 일 아니겠소? 이럴게 아니라 우리가 멸문을 당할지언정 밀약을 맺어 선대 무황께 보답하기로 합시다."
동승은 크게 기뻐하며 흰 비단 한 폭을 내와 먼저 자신의 이름을 적고 수결을 했다. 뒤이어 왕자복이 서명을 마쳤다.
왕자복은 잠시 생각한 후 눈을 빛내며 말한다.
"거사를 위해서는 충의지사가 더 필요하오. 오자란(吳子蘭)이라면 나와 가까울 뿐더러 믿을만하니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동승 역시 두 사람을 천거했다.
"가신들 중에 충집과 오석(吳碩)이 내 심복이나 다름없으니 함께 하려 들 것이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향후의 일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시종으로부터 충집과 오석이 찾아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오! 하늘이 우릴 도우심이외다."
동승은 희색이 만면하였으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음성을 낮추어 왕자복에게 말했다.
"공은 잠시 병풍 뒤에 숨어 계시오."
왕자복이 병풍 뒤에 숨은 지 얼마 안 되어 충집과 오석이 들어왔다. 주객이 좌정하고 함께 차를 마시는데 충집이 홀연히 묻는다.
"공은 허전에서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동승은 짐짓 무심하게 반문했다.
"무슨 일을 말하는 것이오?"
"공은 조조의 무례한 언행을 보고 분개하지 않았단 말이오?"
"분개는 하였소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소."
그러자 오석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내 맹세코 도적놈을 죽이고 싶었지만 힘이 미약하여 그리 하지 못한 것이 한이오!"
충집 또한 비분강개하여 말했다.
"폐하와 무림을 위해 내 한 목숨 버린다 해도 여한이 없소이다만 어찌하여 의인이 이다지도 없단 말이오?"
이때였다. 왕자복이 병풍 뒤에서 불쑥 튀어나오며 꾸짖었다.
"이제 보니 너희 두 놈이 조대공께 반심을 품고 있었구나! 내 곧 달려가 고할 테니 동공은 증인이 되어 주시오!"
충집이 벌떡 일어서며 노성을 내질렀다.
"충렬지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설사 죽어서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네놈처럼 간적에게 아부하며 살겠느냐? 마음대로 하거라!"
동승은 웃으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침 우리 두 사람도 그 일을 이야기하던 참이었소이다. 왕공은 농담으로 한 말씀이외다."
그는 소매 속에서 유협의 밀조를 꺼내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밀조를 읽고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린다. 동승은 탄식하며 비단 천을 꺼내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폐하의 뜻을 받들어 일을 도모코자 하니 두 분께서도 여기에 서명하시구려."
그러자 왕자복이 말했다.
"여러분은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 얼른 가서 오자란을 데리고 오겠소이다."
왕자복은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오자란과 함께 돌아왔다. 충집, 오석, 오자란이 차례로 서명하자 동승을 그들을 후당으로 청해 술자리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무렵, 서량의 호웅 마등(馬騰)이 찾아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동승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종에게 말했다.
"내가 병중이라 만나 뵙지 못한다고 여쭈어라."
시종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들은 마등은 대문 앞에서 노발대발했다.
"바로 어제 너희 주인이 무황폐하의 금포와 옥대를 두르고 나오는 것을 봤거늘 새삼 웬 병중이란 말이냐? 내 한가하여 온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만나지 않겠다는 거냐!"
시종이 그 말을 동승에게 전하니 동승은 어쩔 수 없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랑에서 마등을 맞이했다. 마등은 그를 보자마자 따지고 들었다.
"내가 폐하를 뵈러 허도에 올라왔다가 돌아가는 마당에 공께 하직을 고하고자 했는데 어째서 만나지 않으려는 것이오?"
동승은 어색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내가 갑자기 몸이 불편하여 영접하지 못했으니 널리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마등은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날카로운 눈으로 동승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공의 신색이 붉고 환하여 무슨 병환이 있는 것 같지가 않소이다. 어찌하여 날 피하는 것이오?"
동승은 그만 할 말을 잃고 이리저리 눈길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마등은 소매를 떨치고 일어서며 한탄했다.
"허허! 누구나 천하를 구할 사람은 아니로구나!"
동승은 그 말에 마음속에 느껴지는 바가 있어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공은 누구를 두고 천하를 구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