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유협이 은밀히 공신각에서 동승을 만나고 있다는 보고를 전해 듣고 무황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굳이 공신각을 택한 이유는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의심이 많은 조조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무황전에 사람을 심어놓고 유협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무황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빠짐없이 감시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협이 공신각에서 동승을 만나고 있다니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가 종종걸음으로 무황성으로 들어서고 있는데 저만치 앞에서 동승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동승은 그를 발견하자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조조와 눈길이 마주친 터라 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조조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옆으로 비켜서며 예를 표했다.
조조는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공은 무슨 일로 입전했었소?"
입전(入殿)이란 용어를 쓴 것은 이미 그가 무황전에 들렀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동승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과연 무황전을 감시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그는 속여 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
"폐하께서 부르셔서 알현했습니다."
조조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무슨 일로 부르셨소?"
"일전에 이 사람이 폐하를 모셨던 공로를 치하하신다며 입고 계시던 금포와 옥대를 하사하셨습니다."
조조의 눈이 예리하게 동승의 아래위를 훑었다. 그는 서슴없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디 그 옥대를 끌러 내게 보여주시오."
동승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필경 금포나 옥대 속에는 무황의 밀조가 들어있을 것일 텐데 조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것이 아닌가? 그가 안색이 변해 멈칫하는 것을 본 조조는 수행무사들을 향해 외쳤다.
"뭣들 하느냐? 빨리 끌러오너라!"
두 명의 무사가 득달같이 달려드는 바람에 동승은 옥대를 빼앗기고 말았다. 조조는 옥대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과연 좋은 옥대구려. 그럼 이번에는 금포를 벗어 보시오."
동승은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입고 있던 금포를 벗어 건네주었다. 조조는 손수 금포를 펼쳐 이곳저곳 자세히 살펴보았다. 심지어는 햇빛에 비추어 보기까지 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자 그는 금포를 걸쳐 입고는 수행무사들에게 물었다.
"어떠냐? 잘 맞느냐?"
수행무사들이 앵무새처럼 말했다.
"꼭 맞습니다!"
조조는 동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공은 이 옥대와 금포를 내게 양도하시겠소?"
동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을 어찌 드리겠습니까? 제가 따로 한 벌 지어 바치겠습니다."
조조는 찌르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추궁했다.
"내가 금포나 옥대 따위가 없어 그러는 줄 아시오? 그대 역시 마찬가지요. 폐하께서 굳이 그대를 불러 금포와 옥대를 하사한 것이 이상해서 그러오. 혹 무슨 모계가 있는 건 아니오?"
동승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조조는 마치 공신각에서의 일을 직접 본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그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굳이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조조는 껄껄 웃으며 금포와 옥대를 벗어 돌려주었다.
"공이 폐하께 하사받은 것을 내 어찌 빼앗겠소? 농으로 한 말이외다."
동승은 식은땀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찌나 겁나고 당황했던지 돌아오는 도중에 몇 번이나 발이 엉켜 넘어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는 밤늦도록 금포와 옥대를 펼쳐놓고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무황의 밀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폐하께서 자세히 살펴보라고 당부하신 데는 분명 깊은 뜻이 있을 텐데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는 옥대를 들고 다시 살펴보았다. 영롱한 백옥이 촘촘히 박혀있는 옥대에는 소룡천화(小龍穿花)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뒤편에는 자금(紫錦)이 대어져 있었는데 곱게 바느질 마감이 되어있을 뿐 아무리 살펴봐도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동승은 금포와 옥대를 살펴보고 또 살펴보고 하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홀연히 무엇인가 타는 냄새가 느껴져 눈을 뜬 그는 깜짝 놀랐다. 등잔 심지에서 불똥이 떨어져 옥대의 뒤판이 타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런!"
그는 황급히 불똥을 털어냈다. 하지만 이미 옥대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황감한 마음으로 불에 탄 구멍을 쓰다듬던 그는 구멍 속에서 피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는 소도를 가져와 옥대의 솔기를 뜯어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피로 쓴 밀조가 들어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근자에 도적이 권세를 빌어 무벌(武閥)을 형성하여 무황성을 제멋대로 농단하고 있으니 짐은 그만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도다! 항차 짐이 우려하는 것은 도적으로 인하여 무림천하가 어지러워짐이라, 짐은 본성의 가신이자 장인인 그대에게 부탁하노라. 널리 충의열사(忠義烈士)들을 모아 간악한 무리들을 몰아내고 무황성의 권능을 회복해주기 바란다. 짐이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밀조를 내리니 부디 선황의 뜻으로 성립된 무황성의 재건을 위해 나서주기 바라노라!>
"크흐흑! 폐하!"
동승의 눈에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유협이 피로 쓴 밀조를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당금의 무황성이 직면한 상황과 조조 앞에서 겁에 질려 벌벌 떨었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너무나 원통하고 부끄러워졌다.
그는 분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새우고 말았다. 새벽녘에 다시 밀조를 읽고 또 읽으며 어떻게 하면 무황의 밀조를 이행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내 봐도 마땅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지친 나머지 서탁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