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는 오는 길에 유비에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형님도 보지 않았소! 놈이 폐하를 업신여기는 것을 말이오. 이대로 두면 놈은 머지않아 반기를 들 것이오. 차제에 단칼에 죽여 화근을 없애야 했는데 왜 막은 것이오?"
유비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자칫하면 쥐를 잡으려다 독을 깰까봐 그랬네. 자네도 한번 잘 생각해 보게. 당시 조조의 주위에는 심복들이 에워싸고 있었네. 경솔하게 나섰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폐하께서 다치실 지도 모르는 일이네. 그렇게 되면 모든 죄를 우리가 덮어쓰게 될 걸세."
관우가 생각해보니 그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못내 아쉬워서 투덜거렸다.
"오늘 그 역도를 죽이지 못했으니 언제고 반드시 화가 될 겁니다."
유비는 그를 타일렀다.
"오늘 일은 가슴에 새겨두고 절대로 발설해선 안 되네."
사냥에서 돌아온 유협은 내전에 들어서자마자 비분의 눈물을 흘렸다. 그것을 본 황후가 놀라서 물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사옵니까?"
"아아! 과거에는 간웅 동탁에게 괴롭힘을 당하더니 다시 이각, 곽사의 난을 만나 우리 부부가 천애를 유랑하며 모진 고생을 하지 않았소? 그 뒤에 조조가 구해주는 바람에 환란이 끝났다 여겼거늘ㆍㆍㆍ 그 자가 무황성을 한 손에 쥐고 농단할 줄을 어찌 알았겠소? 오늘 사냥터에서 그가 짐 대신 하례를 받으니 그 무례함이 하늘을 찔렀소이다. 그걸 보니 조만간 모반을 할 게 분명한즉 내겐 아무 힘도 없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소?"
황후는 분을 이기지 못해 물었다.
"천하무림이 무황성의 은전을 받아왔는데 한 사람도 난국을 타파할 자가 없단 말인가요?"
황후의 말이 끝나는 순간 누군가 들어서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심려 마시옵소서. 신이 한 사람을 천거하여 환란을 덜도록 하겠습니다."
유협과 황후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내전으로 들어선 인물은 복완(伏完)이었다. 그는 복황후의 아버지, 즉 유협의 장인이었다. 유협은 눈물을 거두며 물었다.
"장인께서는 달리 복안이라도 있으시오?"
복완은 노기를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사냥터에서의 일을 그 누군들 보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모두가 한 통속들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어찌 놈의 망동을 더 이상 보고만 있겠습니까? 노신(老臣)은 권력이 없어 거사할 수 없지만 마침 마땅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 그게 누구요?"
"동승이옵니다."
"오ㆍㆍㆍ 그 분이라면!"
유협의 안색이 환해졌다. 동승은 그의 외척(外戚)으로 후궁 동귀비(董貴妃)의 부친이기도 하다. 동승은 그가 이각, 곽사에게 ?길 때 수행하며 수차례나 목숨을 건져준 충신이었다. 유협은 눈물을 거두며 말했다.
"그 분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본가를 위해 나설 분이니 믿을만하오. 그럼 내일 일찍 내전으로 불러 함께 대사를 의논해보도록 합시다."
복완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오나 폐하의 좌우에 적도들의 눈과 귀가 널렸으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럼 어찌해야 하오?"
"신에게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폐하께서 금포(錦袍) 한 벌과 옥대(玉帶)를 동승에게 하사하시되, 옥대 속에 은밀히 밀조(密詔)를 넣어 꿰맨 다음 집에 돌아가 읽도록 하는 겁니다. 그럼 동승이 알아서 대사를 도모할 것이옵니다."
유협은 무릎을 쳤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복완은 하직을 고하고 내전에서 물러났다. 유협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血書)로 밀조를 썼다. 피를 토할 듯한 심정으로 밀조를 써내려가는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연후 황후에게 비단옷을 짓게 한 후 옥대 속에 밀조를 넣고 꿰매도록 했다. 그는 금포를 입고 그 위에 옥대를 둘렀다.
다음날 동승이 영문도 모른 채 내전으로 불려 들어오자 유협은 그에게 말했다.
"짐이 간밤에 황후와 함께 지난날 고초를 겪던 일을 얘기하다가 그대를 떠올리게 되었소. 새삼 그대가 짐과 무황가를 위해 헌신한 것을 생각하고 작으나마 보답을 할까하여 불렀소이다."
동승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감격을 금치 못했다.
"황송하옵니다!"ㆍㆍㆍ
유협은 그를 데리고 태묘(太廟)로 갔다. 조조 측근의 눈과 귀도 피할 겸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는 태묘의 공신각(功臣閣)에 향을 사른 후 벽에 걸려있는 초상화를 바라보며 지나가다 그 중 한 화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천무대제 유방의 초상화였다.
"그대는 이 분이 누군지 아시오?"
동승은 깜짝 놀라 초상화 아래 엎드리며 말했다.
"신을 놀리시는 겁니까? 무황성을 세우신 천무대제이심을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유협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 대제께서는 검을 들어 어지러운 무림을 평정하신 후 수백 년 기업의 무황성을 창건하셨소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 분의 자손인 짐은 이렇듯 힘없고 무능한 존재가 되었으니 어찌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소?"
동승은 황공한 나머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유협은 손가락을 들어 천무대제의 좌우를 받들고 있는 두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두 분은 장량(張良)과 소하(蕭何)가 아니오?"
동승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대제께서 무황성을 일으키실 때ㆍㆍㆍ 두 분의 힘이 실로 컸ㆍㆍㆍ 습니다."
동승의 음성이 격동으로 인해 가늘게 떨렸다. 그는 비로소 유협이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던 것이다. 유협은 주위를 둘러본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도 마땅히 저 두 분처럼 내 곁에 서 주구려."
동승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신이 아무 공도 세우지 못했는데 어찌 감히 바라겠나이까?"
"짐을 구해준 공이 있지 않소? 하루라도 그것을 잊은 적이 없거늘, 짐은 아무 것도 줄 것이 없구려."
유협은 자신이 입고 있는 금포와 옥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공은 부디 짐의 금포를 입고 이 옥대를 두른 후 항상 짐의 곁에 있는 듯하여 주구려."
동승이 고개 숙여 사례를 올리자 유협은 입고 있던 옷과 옥대를 벗어 그에게 주었다.
"그대는 돌아가 자세히 살펴보고 짐을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시오."
동승은 그의 말뜻을 헤아렸다. 그는 하사받은 금포와 옥대를 착용한 후 유협에게 하직을 고하고 공신각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