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어떤 명분을 끌어내더라도 진궁만은 살려주고 싶었으나 이쯤 되면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궁은 스스로 일어나 대 아래로 내려갔다. 주위사람들이 만류했으나 그는 뿌리치며 형장을 향해 의연하게 걸어갔다.
조조는 그의 기개 있는 모습에 의자에서 일어나 아래로 내려가며 그를 배웅했다.
"아깝도다! 아깝도다! 저 같은 지조 있는 사람이 이슬로 사라지다니......."
조조의 탄식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고개를 떨어뜨린 채 진궁의 마지막 길을 바래다주었다. 조조는 수하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지금 즉시 진공의 노모와 처자를 허도로 보내 정중히 모시도록 하라. 만일 태만하게 처리하는 자가 있다면 참수하겠노라."
한편 여포는 조조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비를 향해 말했다.
"공은 좌상객(座上客)이 되고 나는 계하수(階下囚)가 되었구려. 우리 사이에는 과거의 정리가 있는데 어찌하여 날 위해 한 마디도 안 해주는 것이오?"
유비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조조가 돌아와 자리에 앉자 여포는 큰 소리로 말했다.
"조공의 가장 큰 근심거리가 이 여포였는데 지금 내가 항복했으니 아무 근심도 없게 되었소이다. 오늘 이후로 내가 조공의 오른팔이 되어 돕는다면 천하를 평정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 아니오? 부디 거두어 주시오!"
여포의 말에 모두 놀라 안색이 변했다. 천하의 여포가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 전 그의 수하였던 진궁이 스스로 형장으로 걸어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를 개탄해마지 않았다.
조조는 유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여포는 간절한 눈으로 유비를 바라보았다. 그는 유비가 자신을 위해 좋은 말을 해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유비의 대답은 그의 염원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대공께서는 정공과 동탁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정공이란 여포가 모시던 정원(丁原)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여포는 정원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었으나 이숙의 꾐에 빠져 정원을 죽이고 동탁의 오른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포는 두 번째 주군인 동탁도 죽인 바 있었다. 유비가 정원과 동탁의 일을 잊었느냐고 물은 것은 여포가 배신을 밥 먹듯이 한다는 것을 일깨운 것이었다.
조조는 물론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여포를 살려줄 마음이 터럭만큼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물어본 것은 유비를 표면에 내세움으로써 자신이 뒤로 빠지려는 의도였다.
"저놈을 끌어내 목을 매달아라!"
조조의 명이 떨어지자 여포가 버럭 소리쳤다.
"유비 이놈아! 정말 신의 없는 놈이구나! 내가 전날 화살로 수술을 쏴 구해준 일을 잊었단 말이냐? 네놈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그때 누군가 노성을 내질렀다.
"여포 이놈아! 죽을 땐 당당하게 죽어야지, 그게 무슨 추한 꼴이냐?"
모두들 고개를 돌려보니 장요가 끌려오며 외친 것이었다. 여포의 수하인 장요의 눈에도 목숨을 구걸하는 여포의 모습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조조는 눈살을 찌푸리며 명을 내렸다.
"지금 당장 여포의 목을 매단 후 수급을 내다 걸어라!"
여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도수부들에게 번쩍 들린 채 형장으로 끌려갔다. 천하제일의 고수로 대륙을 질타하며 호웅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던 그였으나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무림의 큰 별 하나가 허무하게 떨어진 것이다.
조조는 장요를 보고 물었다.
"그대를 어디선가 본 것 같구나."
장요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복양에서 만났는데 벌써 잊었느냐?"
조조는 무릎을 쳤다. 복양에서 진궁의 계책에 빠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일을 기억해낸 것이다. 장요는 당시 그의 심복인 하후돈과 30합을 싸웠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했던 맹장이었다.
"이제 알겠다. 바로 그대였었군."
장양은 한스러운 듯 말했다.
"아깝구나, 아까워!"
"뭐가 아깝단 말이냐?"
장양은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그날 불길이 더욱 거세어 네놈을 태워죽이지 못한 게 아깝단 말이다."
"뭣이? 곧 죽을 놈이 웬 헛소릴 하는 거냐?"
조조는 화가 치밀어 직접 검을 뽑아 장요를 죽이려했다. 장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조조를 노려볼 뿐이었다. 바로 그때 조조의 팔을 잡는 자가 있었으니 유비였다.
"이 같은 진실한 사람은 살려두어 중히 쓰는 것이 좋습니다."
이때 관우가 다가와 조조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관모는 오래 전부터 장공이 충의지사임을 알고 있소이다. 부디 목숨을 보전케 해주십시오."
조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비는 그렇다 쳐도 평소 진중하기 그지없는 관우까지 직접 나설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곧 껄껄 웃으며 말했다.
"실은 나도 이 사람의 충의를 아는 까닭에 장난을 해본 것뿐이오."
그는 검을 던지고 직접 장요의 포박을 끌러주었을 뿐더러 자신의 피풍을 벗어 걸쳐주었다. 아울러 그를 자신의 자리로 데려가 상석에 앉혔다. 그의 이런 정중한 태도에 뻣뻣하기만 하던 장요도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신(臣) 장요, 조공께서 거두어 주시다면 남은 일생 충성을 다하겠소이다."
파란만장한 하비 공략도 막을 내렸다.
여포의 죽음은 무림의 판도를 뒤바뀌게 할만한 대사건이었다. 조조는 여포를 제거함으로써 확고부동한 발판을 마련했을 뿐더러 그의 명성은 천지를 진동시켰다.
여포가 죽은 이상 그의 수하들은 더 이상 싸울 의미를 잃고 말았다. 장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장요의 권유에 의해 무사들을 이끌고 가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는 그에게 직책을 내린 후 손관, 오돈, 윤예 등도 차례로 귀순하도록 했다. 한때 여포를 따르던 자들은 거의 다 그의 수하로 들어오게 되었다. 다만 창희만이 그에게 항복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조조는 장패로 하여금 낭야를 지키게 하고 손관 등의 무리도 직책을 내려주어 청주와 서주 변방을 다스리도록 조치했다.
한편 조조는 여포의 식솔들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는데 유독 초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천하제일미인인 초선이 사라진 것에 대해 몹시 아쉬워했다. 하지만 어디서도 초선을 찾을 수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여포의 수급이 걸려있는 곳에서 몇날 며칠동안 한 여인이 구슬피 울다가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소문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조조는 크게 잔치를 열어 수하들을 배불리 먹게 한 후 허도로 출발했다. 그런데 서주에 이르자 연도에 무수한 사람들이 나와 그에게 절을 하며 요청하는 것이었다.
"부디 유공으로 하여금 서주를 다스리도록 해 주십시오!"
조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유비는 그의 식객에 불과할 뿐 아무런 힘도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큰 힘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심(民心)이었다.
조조는 새삼 유비를 돌아보았다. 유비는 눈을 반개한 채 묵묵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조는 유비의 내심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경계심이 생겼다.
'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이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단 말인가? 이거야말로 정말 무서운 능력이 아닌가?'
그는 서주의 양민들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너희들의 뜻은 알겠으나 유공은 이번 토벌에 큰 공을 세웠으니 무황께 알현한 후 돌아와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제야 양민들은 안심하고 물러났다. 조조는 서주를 차주(車胄)에게 맡긴 후 허도로 향했다. 그러나 일행이 서주를 지나가는 연도에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많은 양민들과 무림인들이 몰려들어 유비를 향해 절을 했다.
그것을 본 조조의 마음은 더욱 편치 않았다. 서주를 여포로부터 회복한 것은 유비가 아니라 그였지만 민심은 유비에게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으나 내심으로는 마음이 식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