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루 위에 여포가 모습을 드러내자 조조는 음성을 가다듬은 후 말했다.
"내가 예까지 온 것은 여공이 원술과 결친(結親)한다는 말을 들어서였소. 원술로 말할 것 같으면 무황을 사칭한 무림의 반도(叛徒)이거늘, 천하공적 동탁을 죽여 큰 공을 세운 그대가 어찌하여 반도를 좇는단 말이오? 내 이제 무황폐하의 명을 받들어 그대를 응징하려 하오. 하지만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무황폐하께 품하여 작위를 내리게 할 것이오."
조조의 설득에 여포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조조를 향해 말했다.
"조공은 잠시 물러가 계시오. 내 생각 좀 해보리다."
그때였다. 갑자기 여포의 곁에 서있던 진궁이 조조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 게 아닌가?
"간적 조조야! 개소리 말고 화살이나 받아라!"
진궁은 활을 당겨 조조를 향해 쏘았다. 화살은 조조가 쓰고 있던 일산(日傘)에 적중되었다. 조조는 안색이 흙빛이 된 채 노성을 발했다.
"내 기필코 네놈을 죽이고 말겠다!"
그는 진궁의 돌출행동에 거짓화의 하려던 마음을 버리고 하비를 칠 것을 다짐하며 일단 뒤로 물러났다. 진궁은 어이없어 하는 여포에게 곧바로 계책을 냈다.
"조조는 먼 길을 오느라 지쳤을 테니 주공께서 지금 즉시 무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진을 치십시오. 저는 성을 지키고 있다 조조가 싸움에 응하면 반대쪽으로 나가 배후를 치겠습니다. 만일 조조가 진격하여 성을 치면 주공께서는 뒤로부터 구원해 주십시오. 아마 열흘도 못가 놈들은 피폐해질 것입니다. 그때 동시에 공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이는 사슴을 잡을 때 앞에서는 뿔을 잡고, 뒤에서는 다리를 함께 붙잡는 이른바 기각지세(?角之勢)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포도 바보는 아니었다. 진궁의 계책에 일리가 있음을 느낀 그는 용기가 솟아났다.
"그대의 말이 지당하오."
그는 무사들을 정돈하며 조조를 칠 준비를 했다. 때는 겨울이라 혹한(酷寒)이 엄습하고 있었다. 그는 전군에 명을 내려 두터운 솜옷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그가 한참 공격할 채비를 차리는데 초선과 두 번째 부인이 찾아와 불안한 듯 물었다.
"무슨 일로 행장을 꾸리시는 건가요?"
"조조를 치러갈까 하오."
여포는 두 여인의 안색이 변하자 진궁의 계책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두 여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일제히 반대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그러다 변이라도 당하면 천첩들은 어찌 살란 말인가요?"
두 여인의 말에 여포는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기실 조조와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하는 바람에 용기가 죽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핑계 김에 사흘이 지나도록 출전을 미루었다. 그러자 진궁이 찾아와 간했다.
"조조가 사면으로 성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빨리 나가지 않으면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여포는 난색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나가 싸우느니 안에서 굳게 지키느니만 못할 것 같네."
진궁은 고개를 저으며 설득했다.
"첩보에 의하면 조조가 군량이 부족해서 사람을 허도로 보냈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군량이 당도할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정예무사들을 이끌고 나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십시오. 그럼 놈들은 꼼짝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포는 다시 귀가 솔깃해져 부인들에게 그 말을 전했다. 그러자 초선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지아비께서 떠나면 진궁과 고순이 무슨 수로 성을 지키겠습니까? 만에 하나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돌이킬 수 없게 되옵니다. 하기는 큰 뜻을 품은 분께서 어찌 첩신 따위를 생각하겠나이까? 뜻대로 하시옵소서."
초선은 지난밤에 불길한 꿈을 꾸었다. 무황성이 화염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고립된 채 여포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꾼 것이다. 아무리 소리치며 여포를 불렀지만 화염 저편에서 여포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채 엉뚱한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깨어나 보니 베게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평소의 초선은 결코 여포가 하는 일에 나선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날만큼은 왠지 매달리고 싶었다. 그래서 눈물로 하소연한 것이었다.
여포는 가여운 마음이 들어 초선을 껴안으며 장담했다.
"그대는 아무 염려 말게. 내게 천극도와 적토마가 있는데 누가 감히 범접하겠소?"
그는 진궁을 불러 완강한 어조로 말했다.
"조조의 군량이 온다는 것은 흉계일지도 모르네. 조조란 놈이 워낙 궤계가 무쌍한 놈이라 섣불리 움직여선 안 될 것이네."
진궁은 밖으로 물러나오며 장탄식했다.
"아아! 이제 우린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겠구나!"
그날 이후 여포는 내전에 틀어박힌 채 두 부인과 술을 마시며 답답한 심사를 달래기만 했다. 그로서는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1년처럼 길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사인 허사와 왕해(王楷)가 들어오더니 계책을 올렸다.
"지금 회남에서는 원술이 성세를 떨치고 있다고 합니다. 일전에 그와 혼사를 이룰 뻔한 일이 있으니 이번에 다시 혼사를 맺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술과 결친하면 주공의 위기를 두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포는 귀가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원술에게 보내기로 했다. 허사는 밀서를 품에 간직한 후 말했다.
"조조가 포위하고 있으니 길을 열 무사들을 내어주십시오."
"그야 물론이지."
여포는 장요와 학맹에게 1천명의 무사를 내주어 두 사람을 성 밖 협곡까지 바래다주도록 지시했다. 그날 밤 장요와 학맹은 질풍같이 내달려 단숨에 협곡 밖까지 빠져나갔다. 조조의 진영에서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미처 그들을 막지 못했다.
학맹은 500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허사, 왕해와 함께 회남으로 떠가고 장요는 남은 무사들과 함께 회군하여 협곡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관우가 그를 가로막았다. 양측이 막 싸움을 벌이려는데 고순이 한 무리의 무사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장요를 구하기 위해 하비에서 달려온 것이었다. 장요는 고순의 도움으로 간신히 하비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편 허사와 왕해는 원술에게 여포의 서신을 전달했다. 그런데 원술의 반응은 냉담했다.
"일전에 사자를 죽이고 혼사를 깨더니 다시 말을 뒤집는 건 무슨 연유인가?"
허사는 간담이 써늘해졌지만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지난 일은 조조의 간계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통촉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술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조조로 인해 위급함이 없었다면 딸을 내어줄 리가 없지 않겠느냐!"
허사는 고개 숙이며 절박하게 말했다.
"만일 주공을 도와주지 않으시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환난을 겪을 것이옵니다. 이는 폐하께도 이롭지 않은 일이옵니다."
순망치한이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려진다는 말이다. 즉, 여포와 원술은 입술과 치아의 관계니 서로 의지해야한다는 뜻이었다. 원술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마음을 열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포가 워낙 반복이 극심하니 내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딸을 먼저 보내주면 원군을 파견하도록 하겠다."
이쯤 되면 허사와 왕해도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하직을 고하고 학맹과 함께 귀로에 올랐다. 하비로 향하는 협곡이 다가오자 허사는 행군을 멈추게 한 후 말했다.
"필경 조조가 협곡을 지키고 있을 테니 낮에는 통과하기 힘들 것이오. 밤중에 우리 두 사람이 먼저 통과할 테니 학공이 뒤를 끊어주시오."
그날 밤 허사와 왕해가 먼저 협곡으로 들어서고 학맹이 그 뒤를 따랐다. 학맹이 협곡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일성대갈과 함께 고리눈의 대한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놈들아! 쥐새끼처럼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
학맹을 막아선 것은 장비였다. 학맹은 이를 악물고 장비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가 어찌 장비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 단 1합 만에 그는 장비의 손에 사로잡혀 버렸고, 500여 명의 수하들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장비는 학맹을 꽁꽁 묶어 유비에게 데려갔다. 유비는 다시 그를 조조의 영채로 보냈다. 조조는 얼마 전 학맹이 야음을 틈타 빠져나갔던 사실을 상기하고 그를 엄중히 신문했다. 결국 학맹은 여포와 원술이 혼사를 맺기로 했다는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다.
조조는 노성을 내질렀다.
"저놈을 당장 끌어내 참수하라!"
학맹은 참수되어 진영 밖에 효수되고 말았다. 조조는 각 진영에 군령을 하달했다. 그것은 여포나 여포의 수하들이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것을 철저히 막으라는 것이었다. 만일 한 명이라도 놓치면 군율에 따라 엄히 다스리겠다는 것이었다.
군령을 받은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불렀다.
"우리가 진을 친 곳이 회남으로 통하는 요로이고 보니 자네들은 각별히 조심해 군령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게."
그 말에 장비가 발끈하고 나섰다.
"젠장! 상을 주기는커녕 엄포만 놓으니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우리가 놈의 수하라도 된단 말이오?"
장비가 핏대를 올리는 데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비록 조조에게 의탁하고 있기는 해도 한번도 그의 수하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기회만 되면 삼형제가 뭉쳐 천하를 쟁패하리란 생각으로 꽉 차 있으니 이만저만 아니꼬운 것이 아니었다.
유비도 장비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낮게 탄식하며 말했다.
"영웅은 때를 헤아릴 줄 아는 법일세. 지금은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있으니 그가 장령을 쓰는 것을 이해해야 하네. 자네는 부디 실수가 없도록 하게."
관우는 유비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장비의 어깨를 두드리며 타일렀다.
"아우, 우리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진 않을 걸세. 형님의 말이 옳으니 따르도록 함세."
한편 여포는 허사와 왕해로부터 원술의 말을 전해 듣고 고민에 빠졌다.
"조조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데 무슨 수로 딸아이를 내보낸단 말인가?"
허사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학맹이 잡혔으니 조조도 사정을 모두 알게 됐을 겁니다. 주공께서 직접 나서지 않는 한 놈들의 포위망을 뚫기 힘들 겁니다."
여포는 눈썹을 꿈틀하며 말했다.
"좋다! 오늘밤 직접 포위를 뚫겠다."
허사는 반색을 했지만 손가락으로 간지(干支)를 짚어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흉살(凶殺)이 든 날이라 피해야 합니다. 마침 내일이 길일이니 술시(戌時)에서 해시(亥時) 사이에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포는 장요와 고순을 불러 명을 내렸다.
"자네들은 삼천 명의 무사들과 인솔하고 수레 한 채를 준비하게. 내가 이백 리 밖까지 호송해 줄 테니 그 다음은 자네들이 딸아이를 데려가게."
다음날 이경 무렵, 여포는 수양딸에게 두터운 솜옷을 입힌 후 등에 업었다. 그는 천극도를 움켜쥐고 적토마를 타고 달려 나갔다. 장요와 고순도 3000여 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들이 협곡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다. 관우와 장비가 앞을 막아섰다.
"멈춰라! 어딜 가는 거냐 !"
여포는 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닌지라 두 사람을 피해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비가 앞을 가로막으며 싸움을 걸었다. 여포는 등에 업고 있는 딸이 상처 입을까 두려워 전면에 나서 싸우지 못하고 이리저리 치고받기만 할뿐이었다.
쌍방이 어둠 속에서 혼전을 벌이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함성과 함께 서황과 허저가 무사들을 이끌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여포를 놓치지 마라!"
"놓치는 자는 군율로 다스리겠다!"
삽시에 조조의 수하들이 사방을 에워쌌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듯 덤벼들었다. 여포는 시간이 흐를수록 포위망이 두터워지는 것을 보고 협곡을 빠져나가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할 수 없이 그는 말머리를 돌려 하비로 돌아오고 말았다.
결국 결친을 통해 원술의 도움을 받는 일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여포는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그 날부터 그는 답답한 마음을 술로 달래며 내전에서 두문불출했다.
한편 조조는 하비를 에워싼 지 두 달이 넘도록 아무 성과가 없자 점차 초조해졌다. 그럴 즈음 뜻밖의 보고가 날아들었다.
"장양(張楊)이 여포를 구원하기 위해 거병하다 수하인 양추(楊醜)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양추가 장양의 수급을 주공께 바치러 오던 중에 장양의 심복인 휴고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휴고란 놈은 곧바로 견성(犬城)으로 달아나 버렸다고 합니다."
조조는 뜻밖의 소식에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장양은 유협이 이각과 곽사에게 쫓길 때 양곡과 물자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여포를 구하기 위해 나선 이유는 한때 천하를 떠돌던 여포를 받아들였던 정리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양추에게 목이 잘렸으니 불행하다 아니할 수 없었다. 양추 또한 마찬가지다. 그에게 장양의 수급을 바침으로써 환심을 사려 했지만 장양의 심복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 모두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의 소치가 아닐 수 없었다.
조조는 수하들 중에서 사환(史渙)을 불러 명을 내렸다.
"휴고가 달아났지만 언제 또 칼을 들이댈지 모르니 쫓아가 그의 목을 베어오도록 하라."
사환이 떠나자 그는 모사들을 불러 상의했다.
"장양이 자멸해 다행한 일이긴 하지만 북에는 원소가 있고 동에는 유표와 장수가 있소. 게다가 두 달 넘도록 하비를 격파하지 못해 모두 지친 상태요. 이만 허도로 돌아가 숨을 돌릴까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떻소?"
순유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말했다.
"여포는 이미 여러 번 패해 기가 꺾였습니다. 무릇 장수의 기가 꺾이면 군졸들은 전의를 상실하는 법입니다. 진궁이 아무리 계책이 많다 해도 결단을 내리는데 늦습니다. 여포가 기운을 회복하지 못하고 진궁이 별다른 계책을 내지 못하는 이때 바짝 고삐를 당겨 강공을 펼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크게 후회할 것입니다."
그러자 곽가가 나서며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제게 하비를 깨뜨릴 계책이 있습니다. 무사 이십만을 동원하는 것 보다 나을 것입니다."
그 말에 순욱이 웃으며 받았다.
"혹시 기수(沂水)와 사수(泗水)의 제방을 터뜨리자는 안이 아니오?"
곽가가 크게 웃으며 답했다.
"바로 그러하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