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포는 진등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을 정도로 신뢰하고 있었다.
"그대가 아니면 소관을 잃을 뻔 했군!"
그는 잠시 생각하다 꾀를 낸다고 내었다.
"그럼 자네가 미리 소관으로 가 진궁과 약속하되 횃불로 신호하게. 내 신호를 보는 즉시 공격하겠네."
진등은 그야말로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계책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즉시 소관으로 달려가 진궁에게 말했다.
"조조가 이미 소관을 우회해서 넘어갔소. 서주가 위험지경에 처했으니 공은 속히 서주로 가도록 하시오."
진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주가 떨어지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그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소관을 빠져나와 서주를 향해 달렸다. 진등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문루 위에서 횃불을 올렸다.
여포는 횃불이 오르자 소관을 향해 들이쳤다. 그런데 소관으로부터 일단의 무리들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공격명령을 내렸다.
"놈들을 쳐 죽여라!"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으므로 피차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무리는 한데 엉켜 치열한 혈전을 전개했다.
조조 역시 소관에서 횃불이 오른 것을 보고 총공격을 감행했다. 손관 등 흑도 무리들은 가뜩이나 인원이 모자란 탓으로 변변히 대항도 못한 채 소관을 내팽개치고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조조는 손쉽게 소관을 점령할 수 있었다.
여포는 날이 밝아서야 일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죽기 살기로 싸웠던 상대가 알고 보니 자신의 수하들이 아닌가! 그는 급히 싸움을 중지시켰다. 하지만 이미 양쪽의 피해는 극심한 상태였다.
여포는 풀이 죽어 진궁과 함께 서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주에서는 더욱더 놀라운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문루 아래 당도했을 때였다. 갑자기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이놈들아! 무슨 짓이냐!"
대경실색한 여포가 고함치자 문루 위에 미축이 나타나더니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본래 유대공의 것이었으니 마땅히 주인에게 돌려줘야할 것이 아니냐? 너는 다시는 서주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다!"
여포는 놀라 소리쳤다.
"진규는 어디 있느냐?"
미축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진규는 내가 죽여 버렸다!"
여포는 당황을 금치 못하며 진궁에게 물었다.
"진등은 대체 어디 있느냐?"
진궁은 탄식하며 말했다.
"주공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그 간악한 놈을 찾으십니까?"
여포는 그래도 믿지 못해 수하들을 시켜 진등을 찾아보도록 했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더 늦기 전에 소패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포는 이를 갈며 그의 말에 따라 소패로 향했다. 그런데 절반도 못 갔을 때 일단의 무사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놀랍게도 그들은 소패를 지키고 있어야할 고순과 장요의 무리였다. 여포가 어리둥절하여 무슨 일이냐고 묻자 고순 또한 의아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진등이 달려와 주공께서 적의 포위에 빠졌으니 급히 달려가 구하라 하였습니다."
곁에서 진궁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이것도 놈의 계략입니다."
여포는 피가 거꾸로 흐를 지경이었다. 그는 한동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노성을 발했다.
"내 그 간사한 놈을 쳐 죽이고 말리라!"
그는 선두에 서서 소패를 향해 달려갔다. 과연 진궁의 말이 옳았다. 소패에 당도하니 문루 위에 온통 조조의 기치가 빽빽하게 꽂힌 채 비웃기라도 하듯 기세 좋게 펄럭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이미 소패가 조조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포는 문루 앞에서 노성을 내질렀다.
"배신자 진등은 어디 있느냐! 당장 나와서 내 칼을 받아라!"
문루 위에 진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여포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본래 무황성의 신하거늘 어찌 너 같은 놈을 따르겠느냐? 아직도 헛된 꿈을 꾸고 있다면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거다!"
여포는 진등을 보는 것만으로 화가 치밀어 죽을 것 같은데 욕까지 먹으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모두들 들어라! 죽음을 각오하고 소패를 쳐라! 한 발짝이라도 물러나는 놈이 있다면 내 칼을 받게 될 것이다! 단, 저놈의 목을 베는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다!"
여포는 수하들을 향해 벽력같이 외치고는 천극도를 뽑아들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요란한 함성과 함께 한 떼의 인마들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니 선두에서 달려오는 자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고리눈에 밤송이 같은 수염을 한 작자! 장팔사모를 풍차처럼 휘두르며 달려오는 자야말로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인물이 아닌가.
'저ㆍㆍㆍ 저놈은 장비가 아닌가!'
상황이 이러니 소패는 뒷전이요 일단 장비부터 막아야했다. 그는 고순을 보내 장비를 상대하게 했다. 하지만 고순으로서는 장비를 감당하기가 역부족이었다. 여포는 할 수 없이 말머리를 돌려 장비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처 장비와 어우리기도 전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와 함께 벌판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대군이 달려왔다. 그들은 조조가 이끄는 본진이었다.
여포는 비록 분노로 인해 눈이 뒤집힌 상태였으나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역전의 인물이었다. 그는 재빨리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만일 소패에서마저 적군이 쏟아져 나오면 앞과 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것이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동쪽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퇴각! 동쪽으로 퇴각하라!"
천하의 여포가 싸워보기도 전에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조조의 무리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추격해갔다. 여포의 심정은 말이 아니었다. 싸움판에서 등을 돌리는 것만 해도 이만저만 치욕이 아닌데다 진규 부자에게 속은 것을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