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쯤 추격했을까?
"와아아아!"
돌연 좌측의 산등성이로부터 함성이 울리더니 일단의 무리들이 질풍처럼 달려왔다. 장수는 깜짝 놀랐다.
'또 다른 매복이 있단 말인가?'
그는 이번에도 패하면 다시는 재기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추격을 단념하고 회군하고 말았다. 비록 아쉽기는 했지만 조조에게 이만한 타격을 입힌 것만으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룬 셈이라고 자위할 수 있었다.
그가 전리품과 함께 당당하게 안중으로 돌아오자 유표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가후에게 물었다.
"전에는 퇴각하는 조조를 치는데 필패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패전한 무리로 적을 치는데 이길 것이라고 장담했소. 공의 말이 다 맞았는데 어찌하여 이렇듯 상반된 말을 한 것이오?"
가후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께서는 비록 용병이 뛰어나시기는 하나 조조의 적수는 아니십니다. 조조가 패하기는 했으나 전술에 능한 자입니다. 퇴각하면서 후군에 맹장을 두어 방비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추격한다고 해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표는 얼굴이 붉어졌다. 가후가 그에게 조조의 적수가 아니라고 한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말이었으나 달리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어색하게 기침을 한 후 다시 물었다.
"하면 나중에 추격하면 이길 것이라고 한 말은 또 무슨 근거를 둔 것이오?"
"조조가 황급히 회군하는 것은 필경 허도에 변고가 생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한번 추격을 당해 물리쳤으므로 한시라도 빨리 회군하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재차 추격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에 후군의 방비가 소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길 것을 예측한 것입니다."
유표와 장수는 탄복을 금치 못했다. 실로 치밀한 분석이 아닐 수 없었다. 유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대단한 식견이오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함이 옳겠소?"
가후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는 듯 차분하게 말했다.
"유대공께서는 형주로 회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손책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공께서도 이 곳을 든든히 지키며 순치지세(脣齒之勢)로 양군이 협력하면 당분간은 위험이 없을 것입니다."
유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코앞에 도사리고 있는 손책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는 가후의 말을 따라 무사들을 이끌고 형주로 돌아갔다. 장수 또한 전열을 정비하여 양성을 지키는 데 전념하기로 했다.
조조는 퇴각 중에 후군이 공격 받았다는 전갈을 받고 곧바로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싸움은 이미 종결되었고 많은 수하들이 흩어진 상태였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아아! 한번의 승리가 자만을 불렀구나!"
몇몇 수하들이 그에게 보고했다.
"만일 원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희는 몰살을 했을 것입니다."
조조는 의아하여 원군이 누군가 불러오도록 했다.
잠시 후 한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말에서 뛰어내려 넙죽 절을 했다.
"불초는 강하(江夏) 출신의 이통(李通)으로 여남에서 작은 문파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번에 대공께서 장수, 유표와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미력이나마 돕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조조는 기뻐하며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공의 도움이 날 구했구려!"
그는 이통에게 직책을 부여한 다음 여남을 맡아서 장수, 유표를 견제하도록 했다. 비록 많은 희생을 치르기는 했으나 이통과 같은 든든한 수하를 얻게 된 것은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허도로 돌아온 조조는 무황 유협에게 품하여 자신의 말을 따라준 손책에게 오후(吳侯)란 작위를 내렸다. 그것은 곧 옛 오에 해당하는 영지의 무림을 관장할 수 있는 파격적인 작위였다. 물론 그것은 나날이 강성해가는 손책을 그의 영향권 아래 묶어두기 위한 포석의 일환이었다.
그가 부중으로 돌아와 순욱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밤늦게 곽가가 찾아왔다.
"이 늦은 밤에 웬일이오?"
곽가는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소매 속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내 올렸다.
"원소가 사자를 통해 보내온 것입니다. 자신이 공손찬을 칠 테니 양곡과 무사들을 빌려달라는 내용입니다."
조조는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는 허도를 넘보더니 이젠 무사를 빌려달라고? 대체 무슨 수작인가?"
그는 서신을 펼쳐 읽어보았다. 읽는 동안 그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떠올랐다. 서신의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문구가 사뭇 건방졌던 것이다. 지난날 천의맹주로서의 위엄을 여실히 과시하는 듯한 문구였다.
"놈이 이렇듯 무례한데 치고 싶어도 힘이 부족하니 어쩌면 좋겠는가?"
조조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본 곽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공께서는 심려 놓으십시오. 원소는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조조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째서 그런가?"
"한 고조 유방이 항우를 당하지 못하면서도 끝내 지략으로 이겼습니다. 지금 주공과 원소 또한 그와 같습니다. 주공께서는 열 가지 이길 요인이 있는 반면, 원소는 열 가지 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원소의 힘이 강하나 두려워할 바가 아니란 것입니다."
조조의 눈이 빛을 발했다.
"열 가지 승인(勝因)과 열 가지 패인(敗因)이라? 내게 설명해 주겠소?"
곽가의 입에서 유창한 말이 흘러나왔다.
"첫째, 원소는 예절이 번잡한데 비해 주공께서는 자연에 맡겨두시니 이는 도(道)에 있어 승(勝)하신 점이요, 둘째는 원소는 천리를 역행(逆行)하여 움직이는데 반해 주공께서는 순행(順行)하시니 이는 의(義)에 있어 승함입니다."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 원소가 움직이는 것은 무황을 반역하는 것이되 내가 움직이는 것은 무황의 명을 따르는 것이 되니 순행이라 이 말이로군."
곽가의 말이 계속된다.
"셋째는 치(治)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림이 잘못된 것은 무황의 힘이 쇄하여 지나치게 관대했기 때문입니다. 원소는 여전히 주위의 잘못에 관대하나 주공께서는 엄격하게 잘못을 다스리고 계시니 치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넷째는 도(度)에 있어서 다릅니다. 원소는 겉으로는 재주 있는 자들을 중용하는 듯하나 시기심이 많은데다 친척들을 많이 기용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주공께서는 사람을 쓰는 데 있어 재주만을 우선하니 이 역시 앞선 것입니다. 다섯째는 모(謀)입니다. 원소는 일을 꾀함에 있어 결단력이 부족하지만 주공께서는 계책을 얻으면 바로 실행하십니다. 여섯째는 덕(德)으로 이깁니다. 원소는 명망을 얻는데 목적을 두고 있으나 주공께서는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니 덕에서도 원소를 앞서는 것입니다."
조조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곽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곽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새겨듣고 있음이 분명했다.
"일곱째는 인(仁)입니다. 원소는 가까운 사람만 보살피나 주공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어지십니다. 여덟째는 명(明)인즉, 원소는 수하들이 간(諫)하면 이를 곤혹스러워하지만 주공께서는 밝은 지혜로 행하시니 역시 원소에 앞서는 것입니다. 아홉째로 문(文)에도 이기고 있습니다. 원소는 법도를 펴는데 있어 주관에 치우쳐 옳고 그름이 뒤죽박죽이지만 주공께서는 법도가 밝고 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