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허리춤의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치려했다. 깜짝 놀란 수하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잠시 후 곽가가 달려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춘추(春秋)에 법불가어존(法不加於尊)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큰 법이라도 존귀한 사람을 어쩔 수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대공께서는 만군을 통솔하고 계시는데 어찌 자진하려 하십니까?"
조조는 잠시 침묵하다 중얼거렸다.
"춘추에 그런 예가 있다니 간신히 죽음은 면할 수 있겠군. 하지만 어찌 이대로 넘길 수 있겠느냐?"
그는 칼을 들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다. 그는 잘린 머리카락을 무사들에게 돌려보게 하며 자신의 말을 전달토록 했다.
"내 군율을 어겼으니 마땅히 목을 베어야할 것이나 머리카락으로 대신하도록 한다!"
그러자 모든 무사들이 군율을 두려워하여 행군하면서도 밭을 한 치도 훼손하지 않게 되었다. 조조의 이런 행위는 물론 연극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무사들을 하나로 묶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효과를 발휘했다.
장수는 조조가 쳐들어오자 유표에게 원군을 청하는 한편 뇌서(雷敍), 장선(張先)과 함께 무사들을 이끌고 나섰다. 양측이 대치하자 장수는 앞으로 나가 조조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 놈 조조야! 네 놈은 인의의 탈을 쓴 위선자가 아니냐? 뭣 때문에 자꾸 날 핍박하는 거냐?"
조조는 대로하여 허저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놈의 목을 당장 베어오게!"
허저가 달려 나가니 장수는 장선을 시켜 맞서게 했다. 그러나 장선은 허저의 적수가 못되었다. 3합도 못되어 장선의 목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말았다. 조조는 공격명령을 내렸다. 장수는 싸우다 밀려 다시 성안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는 성문을 굳게 닫고 다시는 싸우려 들지 않았다.
성은 요새나 다름없어 쉽게 침범할 수가 없었다. 조조는 무사들을 독려하여 성밖에 나뭇단을 쌓게 하고 그 위에 올라가 성안을 살펴보았다. 뿐만 아니라 사흘 동안 말을 타고 성벽 주위를 몇 번이나 맴돌며 면밀히 살펴보았다.
조조는 관찰을 끝낸 후 명을 내려 성 한쪽에 나뭇단과 흙을 다져 높은 대를 쌓게 했다.
한편 성안에서 조조가 하는 양을 유심히 지켜본 가후가 장수에게 말했다.
"조조의 속셈을 알았습니다. 놈의 계책을 역이용하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장수는 의아하여 반문했다.
"놈의 속셈이 무엇이기에?"
"조조는 사흘 동안 성벽을 살폈습니다. 그러던 중 동남방면의 성벽이 허술하고 목책 또한 부실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리로 공격하려는 것입니다."
장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엉뚱한 곳에 대를 쌓는단 말인가?"
"그게 바로 조조의 계략입니다. 이른바 성동격서(聲東擊西)라는 것입니다."
장수는 비로소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내일 정예무사들을 모두 동남쪽에 매복시키십시오. 한편으로는 성안의 양민들을 무사로 가장하여 놈들이 대를 쌓는 쪽에 집결토록 하는 것입니다. 조조는 필경 밤을 틈타 동남방면으로 넘어올 것입니다. 놈들이 성안에 들어오도록 기다린 후 일제히 공격을 가하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장수는 크게 기뻐하며 그의 계책대로 하기로 했다.
조조에게 소식이 들어왔다. 대를 쌓는 쪽에 수많은 무사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탐문하도록 했다.
"동남쪽 사정은 어떤지 알아봐라."
탐문 나갔던 수하가 돌아와 보고했다.
"동남쪽은 텅 비어 있습니다."
조조는 기쁨을 금치 못했다.
"놈이 계책에 넘어갔군!"
그는 명을 내려 낮 동안 무사들에게 괭가리를 치며 공격을 가하는 척했다. 밤이 되자 동남쪽으로 무사들을 이동하여 목책을 걷어치우고 성을 뛰어넘도록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성을 타넘는 동안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그는 몸소 무사들을 지휘하여 성을 넘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북소리가 울리며 사면으로부터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속았구나!'
어둠 속에서 사방에 적을 맞으니 무사들은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화살을 맞고 쓰러지고 있었다. 조조는 치를 떨며 퇴로를 찾아보았다. 그 때 장수가 정예무사들을 이끌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 놈! 조조야, 목을 내놓아라!"
조조는 다급히 성벽을 넘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수하들도 태반이 화살을 맞고 죽은 지라 싸우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장수는 4,5리나 조조를 추격하다가 날이 훤히 밝을 무렵에야 무사들을 거두어 성으로 돌아갔다.
조조가 수하들을 점검해 보니 5만 이상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진세는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게다가 여건과 우금이 심하게 다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생각지도 않는 대패를 당한 것이었다.
'아아! 놈을 너무 얕봤구나. 설마하니 내 계책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을 줄이야!'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천하의 조조가 고작 동탁의 잔당인 장수 하나를 못 이기고 수만의 수하들을 잃고 패배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그의 지나친 자만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너무 믿은 나머지 장수에게 가후란 뛰어난 모사가 있다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었다.
한편 가후는 유표에게 사자를 보냈다.
조조가 패퇴하고 있으니 그의 퇴로를 끊어달라는 것이었다. 유표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조조를 죽일 절호의 기회로다.'
그가 막 출병하려는데 급보가 날아들었다. 손책이 장강에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표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집을 비워두면 손책이 달려와 강탈해 버릴 것이 아닌가?'
이 때 괴양이 그에게 말했다.
"손책이 장강에 진을 친 것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조의 술책을 따른 것입니다. 조조가 패퇴하고 있는 이 때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회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유표는 머릿속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맞다. 지금 놈을 죽이지 않으면 언제 죽이겠느냐?"
그는 황조(黃祖)로 하여금 성에 남아 수비하도록 한 후 직접 무사들을 거느리고 안중(安衆)으로 달려가 조조의 퇴로를 끊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장수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장수는 유표가 출병한 것을 전해 듣고 쾌재를 부르며 가후와 함께 전 무사들을 이끌고 조조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주객(主客)이 완전히 전도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