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의 행렬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작지만 알찬 영지가 있었고, 그곳에서 야망의 꿈을 안고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또다시 유랑의 신세가 된 것이다.
"허허! 인생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군, 그래."
유비는 진홍빛 낭자한 황혼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관우가 의아한 듯 물었다.
"무엇이 묘하다는 것입니까? 형님?"
"잃었는가 하면 얻고, 얻었는가하면 잃고 있지를 않는가? 알고 보면 영원한 소유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
곁에 있던 장비의 고개가 푹 숙여진다. 입이 백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장비는 그저 주먹만 움켜쥐었다 풀었다할 뿐이었다.
"조조가 우리를 받아줄까요?"
관우의 질문에 유비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조는 당대의 영웅이네. 더욱이 무황폐하를 모시고 있으니 생각이 남다를 것이네. 아마 박대하진 않을 걸세."
관우의 뇌리에 야심에 찬 조조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조는 오늘날 무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호웅이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허도로 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유비는 허도에 당도한 후 먼저 손건을 보내 의사를 타진했다.
조조는 유비의 서신을 받아 읽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우유부단한 위인이 아니었기에 이내 결론을 내렸다.
'안 그래도 여포와 함께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잘됐군!'
따지고 보면 그가 유비를 싫어한 이유는 유비가 자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포와 갈라졌다면 화살 한 개 쏘지 않고 적수 하나를 제거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내 곁에 두고 다스리는 편이 백번 더 낫다.'
유비가 공손찬과 함께 있을 때만해도 기회만 되면 제거할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이렇게 되면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둬두는 셈이다. 그는 웃으며 손건에게 말했다.
"유공은 내 형제와도 같소. 그가 어려운 처지가 됐는데 내 어찌 외면할 수 있겠소. 어서 모셔오시오."
손건은 기뻐하며 곧바로 유비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다음날 유비는 미축과 손건만을 대동한 채 조조를 찾아갔다. 관우와 장비를 대동하지 않은 것은 조조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함이었다.
조조는 그를 상빈(上賓)의 예우로 맞아들였다. 유비가 그간 일어났던 일들을 상세히 이야기하자 그는 짐짓 위로하듯 손을 잡고 말했다.
"본래 여포는 표리부동하고 의리 없는 놈이외다. 너무 걱정 마시오. 내 아우님과 손잡고 놈을 괴멸해 드리겠소이다."
유비는 공손히 포권하며 말했다.
"말씀만으로도 황송하오이다."
조조는 유비를 위해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어주었다. 그가 유비를 대접하는 모양은 평소 '음흉한 귀 큰놈'이라며 욕하던 것과는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연회가 파하고 유비가 돌아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순욱이 조조를 찾았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아뢰었다.
"유비는 가슴 깊이 야심을 감추고 있는 자입니다.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후환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내게 다 생각이 있소이다."
조조는 그저 담담히 대꾸할 뿐이었다. 순욱은 그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고 내심 한숨을 쉬었지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곽가가 들어오자 조조는 불쑥 물었다.
"순욱이 내게 유비를 죽이라고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곽가는 고개를 저었다.
"당치 않은 말입니다. 주공께서 허도에 무황성을 일으키고 무림을 평안케 한 것을 두고 온 무림인들이 칭송하고 있습니다. 유비는 무림에 평판이 좋은 자입니다. 그가 곤궁에 처해 찾아왔는데 아량으로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그를 죽이면 천하무림이 등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장차 큰 뜻을 세울 주공께 과연 그 누가 믿고 찾아와 목숨을 바치려 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하셔야합니다."
조조는 안색이 밝아졌다.
"그대의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이오!"
다음날 그는 유비에게 예주(豫州)를 다스리라는 교지(矯旨)를 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사 정욱이 들어가 간했다.
"유비는 음흉한 자입니다. 결코 남의 밑에 있을 자가 아니니 이 참에 제거하셔야합니다. 두면 둘수록 위험한 작자입니다."
조조는 빙긋이 웃었다.
"지금은 문호를 열어 인재를 받아들일 때요.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인심을 잃어선 안 되오. 곽군사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오."
정욱은 고개를 흔들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곧바로 유비에게 무사 3천과 양곡을 주어 예주에 진을 치게 했다. 아울러 흩어진 무사들을 모아 소패를 치도록 당부했다. 결국 유비는 얻을 것은 모두 얻은 셈이었다. 그는 조조에게 감사를 표한 후 예주로 향했다.
조조는 곧바로 여포를 칠 채비를 차렸다. 이번에야말로 눈엣가시인 여포를 완전히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시 일은 틀어지고 말았다.
과거 동탁의 수하였던 장제(張濟)가 남양을 치던 중에 불시에 화살을 맞아 비명횡사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장제의 조카인 장수(張繡)가 대를 이어 가후를 모사로 삼고 전열을 정비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표와 손을 잡고 대대적으로 무사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가 유표와 함께 허도를 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어댄다는 것이었다.
조조는 대로했다.
"놈들이 감히 날 치겠다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 아닌가!"
그는 여포보다는 장제부터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니 잠시 허도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또 여포가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지난날과 같은 상황이 반복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이 든 것이었다.
순욱이 그의 근심을 풀어주었다.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포는 단순한 자인지라 멀리 보기보다는 눈앞의 이익을 좇는데 급급한 자입니다."
"그래서?"
"사자를 보내 예물과 함께 작위를 내리고 서주를 다스리라는 교지를 내리십시오. 아울러 유비와 화해하라고 하십시오. 그럼 좋아서 다른 일은 생각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조조는 빙긋이 웃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