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의 작전은 맞아 떨어졌다. 태사자는 삼면에서 동시에 가해진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경현을 버리고 달아나고 말았다. 유독 한 방면의 길이 열려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달리 방도가 없는 탓이기도 했다. 그가 50리쯤 갔을 때 사방으로부터 함성과 함께 수많은 무리들이 공격을 가해왔다.
태사자는 창을 휘두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분전을 벌였지만 대세는 기울어 버리고 말았다. 그의 수하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고 하나 둘 병기를 던지며 투항하고 있었다.
"손책은 어디 있느냐! 용기가 있다면 내 창을 받아라!"
태사자는 노성을 지르며 닥치는 대로 창을 휘둘렀다. 그 때였다.
히히히힝!
갑자기 말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어 버렸다. 사방에서 날아온 오라에 의해 발이 감겨버린 것이었다. 태사자는 말 등에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그물이 그의 몸을 덮어버렸다. 천하의 태사자가 적에게 사로잡혀버린 것이다.
태사자는 생포된 채 손책에게 끌려갔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죽기만을 기다렸다. 손책에게 목숨을 구걸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득의만면하여 모욕을 줄줄 알았던 손책이 단상으로부터 내려오더니 그의 몸에 감긴 포승을 손수 풀어주는 것이 아닌가? 손책은 그의 의복이 갈기갈기 찢겨진 것을 보고 자신의 전포를 벗어 걸쳐주며 말했다.
"그대가 천하의 대장부임을 아오. 공과 같은 분을 알아보지 못한 유요야말로 우둔하기 짝이 없는 작자가 아니겠소?"
"ㆍㆍㆍㆍㆍㆍ?"
태사자는 어리둥절했다. 단칼에 죽일 줄 알았는데 도리어 극진히 대접하는 손책의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게 바라는 게 뭐요?"
손책은 그를 이끌어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며 엄숙하게 말했다.
"그대와 함께 대업을 도모하고 싶소."
태사자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비록 그리 긴 삶은 살지는 않았으나 천지간에 비추어 부끄럽게 살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제대로 한 일이 있기는 있었던가? 제아무리 가슴속에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이 있다면 그를 위해 백 번이라도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유요는ㆍㆍㆍㆍㆍㆍ.
손책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유요는 소심한데다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조차 없는 인물이었다. 과연 그런 위인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것이 옳은 일일까?
태사자는 눈을 번쩍 떴다.
"받아만 주신다면 견마지로(犬馬之勞) 하겠소이다."
손책은 그의 손을 잡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일대일로 싸웠을 때 말이오. 만일 그 때 날 놓아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려 두진 않았을 것이오."
태사자도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야 모르는 일이오."
손책은 태사자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 내내 그는 태사자를 자신의 곁에 두며 몹시 아끼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였다.
태사자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번에 유공이 패해 다른 곳으로 감으로써 그를 따르던 무인들의 마음도 떠났소이다. 불초가 가서 그들을 이끌고 오겠소이다."
손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요. 나와 약조함이 어떻소? 내일 정오까지 돌아올 수 있겠소?"
태사자는 포권하며 말했다.
"정오까지 돌아오겠소이다."
태사자가 떠나자 손책의 모사들은 하나같이 탄식했다.
"그 자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손책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는 꼭 돌아올 것이오."
다음날 손책은 진영 밖에 장대를 세워두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장대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며 태사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모사나 수하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태사자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가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맞은편 들판에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곧이어 수천 명의 인마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이끄는 자는 바로 태사자였다.
"약속대로 돌아왔소이다."
태사자는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이마를 손등으로 훔쳐내며 우렁찬 음성으로 말했다. 손책은 크게 기뻐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내 돌아올 줄 알았소."
그 광경에 손책의 모사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 모두 태사자가 돌아오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오직 손책만이 태사자를 믿어 주었다.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세상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사람을 볼 줄 아는 정확한 안목을 갖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손책은 수만 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강동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그는 수하들을 단단히 단속하여 양민들이나 그 일대의 무림인들을 자극하는 일이 일절 없도록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손책은 젊고 강인한 사나이였다. 그에게는 원대한 야망과 뜨거운 이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넓은 포용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투항해오는 자들을 모두 받아들였을 뿐더러 자신을 싫어하는 자에게도 아량을 베풀어 자유롭게 떠나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그를 등지는 자보다 그를 주군으로 모시기 위해 몰려오는 자들이 훨씬 많았다.
그는 강동을 장악한 후 오랫동안 피신생활에 시달렸던 모친과 아우, 그 밖의 식솔들을 모두 곡아로 불러 들였다. 하마터면 영원히 몰락할 뻔했던 손씨 가문의 장자(長子)로서 자신의 가문을 화려하게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의 세력은 하루가 다르게 뻗어나가 마침내 강남 전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무림의 새로운 패주의 등장은 바야흐로 무림계의 지도마저 바꿔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