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의 뚜껑을 열자 서늘한 한기(寒氣)가 뻗어 나왔다. 손책은 조심스럽게 거울을 꺼냈다. 거울을 만지는 순간 싸늘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흘러들었으나 도리어 정신이 맑아지면서 상쾌한 느낌이 전해졌다.
"ㆍㆍㆍㆍㆍㆍ!"
손책은 틈만 나면 거울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것은 보통 거울이 아니었다. 부친 손견이 낙양의 무황성에 있는 고정(古井)에서 발견한 것으로 천무대제 유방이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이치를 깨달아 창안한 절세무학이 새겨진 백자천경(百子天鏡)인 것이다.
손견은 백자천경을 얻은 후 불행하게도 죽고 말았다. 어쩌면 백자천경에 깃들어 있다는 저주 때문인지도 몰랐다. 백자천경을 얻는 자 천하를 얻을 수 있으나 천하를 경략할 재목이 못되는 자가 얻으면 비명횡사한다는 무서운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행운의 보물이었지.'
손책은 백자천경을 들여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거울의 표면에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선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올챙이 춤추는 듯한 기이한 문양을 형성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문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문자(文字)이며, 한 자 한 자의 문자에는 심오한 무학의 구결(口訣)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손책은 백자천경 상의 비학(秘學)을 익히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의 무공은 무섭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손책은 여강(廬江)을 정복하고 수춘(壽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여강의 패주인 육강(陸康)은 그의 적수가 아니었다. 불과 1000명의 무사만으로 수만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육강을 가볍게 제거한 것이다.
손책은 부친이 죽은 후 강남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곳은 서주와는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당시 서주의 패주 도겸은 손책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손책이 연소하다고 하나 손견을 능가하는 뛰어난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손책은 탁월한 영도력으로 수많은 인재들을 끌어 들이고 있었을 뿐더러 무예 또한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존재는 서겸의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손책은 도겸으로부터 위협을 느낀 나머지 모친과 아우들을 단양(丹陽)에 있는 외숙 오경(吳璟)에게 보내고 수하들과 함께 원술에게 몸을 의탁하기로 했다.
원술은 쌍수를 들어 그를 환영했다.
"허허! 내게 너 같은 아들이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원술이 손책을 받아들인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예로부터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없다고 하지 않던가. 강동의 호랑이였던 손견의 아들이 언젠가는 무서운 경쟁자가 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차라리 자신의 곁에 둔다면 그가 성장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여차하면 제거하기도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순순히 받아주었던 것이다.
원술 또한 과거의 원술이 아니었다.
그는 남양을 장악한데 이어 구강(九江)과 양주(揚州)을 차례로 손에 넣었다. 게다가 여강까지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는 공손찬, 원소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으며 허도의 조조와 협상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는 손책을 적절히 활용해왔다. 예상대로 손책은 여강을 그에게 선사했다.
"껄껄껄! 역시 자넨 나의 오른팔이야."
손책이 돌아오자 원소는 연회를 베풀었다. 많은 사람들이 연회에 참석하여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였다. 모두들 들뜬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축하를 받아야할 당사자인 손책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연회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원술이었다. 게다가 원술은 무수히 많은 공을 세운 손책에게 이렇다할 직책을 내려준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식객 이상의 대접을 한 적이 없었다.
숙소로 돌아온 손책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뜰을 거닐며 들끓는 가슴을 주먹을 쳤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한단 말인가!"
부친 손견은 강동의 호랑이로 군림했었다. 만일 손견이 살아있다면 그는 또 한 마리의 호랑이로 불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원술의 식객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크흐흐흑!"
손책은 벚나무 둥치에 이마를 부딪치며 오열을 터뜨렸다. 그 때였다.
"자네는 어찌하여 사내답지 못하게 우는 것인가?"
손책은 불현듯 들려온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무 그늘 아래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선친께서 생존해 계실 때는 날 중히 쓰셨네. 자네가 길을 모른다면 나에게 물어볼 일이지 어찌하여 홀로 울고 있단 말인가?"
그는 단양(丹陽) 출신의 주치(朱治)란 인물로 손견의 가신(家臣)이었다. 손책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사내답지 못해서가 아니라 선친의 뜻을 따르지 못해 한이 되어 그렇소."
주치는 손책의 손을 잡더니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내게 좋은 계책이 있소이다. 소주(少主)."
손책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엇이오?"
"원술에게 외숙 오경을 구하러 간다는 핑계로 무사들을 얻어낸 후 강동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무사들은 오랫동안 소주를 따랐으므로 허락만 얻어내면 부리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오. 소주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오. 대체 이 곳에서 무엇을 더 얻을 수 있단 말이오? 선주의 뒤를 이어 대업을 도모할 때가 되었소이다."
손책의 눈썹이 불끈 치솟았다.
"난들 어찌 그러고 싶지 않겠소? 하지만ㆍㆍㆍㆍㆍㆍ."
그 때였다.
"핫핫핫! 여기서 무슨 모의를 꾸미는 것이오? 나도 끼어들면 안 되겠소?"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눈썹이 짙고 안광이 예리한 중년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손책은 탄성을 발했다.
"여공이 아니오?"
중년인은 원술의 밑에 있는 여범(呂範)이었는데 손책과는 각별하게 지내온 인물이었다. 여범은 진지하게 말했다.
"내게 충직한 부하가 백 명 정도 있으니 손공의 한 팔 힘이 되어 드리면 어떻겠소?"
손책은 감격을 금치 못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소이다."
3인은 내실로 옮겨 의논을 계속했다. 여범은 주치가 낸 계책을 듣고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좋은 계책이오만 과연 그가 무사들을 내줄지 의문이오."
손책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좋은 생각이 있소이다. 내게 선친께서 물려주신 보물이 있는데 그것을 주고 무사들을 빌려 달라고 하면 들어줄지도 모르겠소."
주치와 여범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손책은 벽장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왔다.
"두 분도 백자천경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을 것이오. 이것이라면 원술도 넘어갈 것이오."
두 사람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그것을 가지고 계셨단 말이오?"
다음날 손책은 원술을 찾아갔다.
"소질이 찾아온 것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입니다. 단양에 있는 외숙 오경이 양주의 유요(劉繇)에게 핍박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직 선친의 원수도 갚지 못한 터에 외숙께서 위기에 처하고 곡아(曲阿)에 있는 모친과 식솔들마저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 이 곳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으니 하루하루가 온통 고통일 뿐입니다. 저에게 무사 수천을 빌려주신다면 당장 강을 건너가 외숙을 구하고 식솔들을 만나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디 윤허해 주십시오."
손책의 간곡한 말에도 불구하고 원술은 찜찜한 표정이었다.
"무사들을 빌려달라고?"
손책은 품속에서 상자를 꺼내놓으며 말했다.
"혹여나 믿지 않으실까봐 선친께서 가보로 물려주신 백자천경을 가져왔습니다. 이걸 맡겨둘 테니 부디 소질의 청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백자천경의 위력은 대단했다. 원술의 안색이 급변하는가 싶더니 벌떡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네가 백자천경을 갖고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원술은 대 위에서 달려 내려오더니 직접 상자 뚜껑을 열어젖혔다. 뚜껑이 열리자 서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백자천경을 꺼내 살펴보았다.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백자천경을 상자 속에 넣은 후 헛기침을 했다.
"험! 그렇게까지 말하니 무사 삼천 명과 마필을 빌려 주겠네. 자네가 외숙과 식솔들을 구하고 돌아오면 그 때 돌려주도록 하겠네. 분명히 말하지만 보물이 탐나서가 아니라네. 워낙 귀중한 물건이라 내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겠네."
손책은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이 놈아! 네 얼굴에 다 써있거늘 모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흥! 지금은 어쩔 수 없어 맡겨둔다면 기필코 되찾고 말 거다.'
백자천경은 무림최고의 보물이었다. 더구나 부친 손견이 목숨을 바쳐 수호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엄청난 보물을 타인에게 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원술에게서 벗어나는 일이 더 중요했다. 보물은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손책은 원술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 즉시 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3000명의 무사들과 마필을 접수한 후 주치, 여범, 그리고 선대부터 충직한 가신이었던 정보, 황개, 한당 등과 함께 수춘을 떠났다.
일행이 역양(歷陽)에 이르렀을 때였다. 한 떼의 인마가 맞은편으로부터 달려왔다. 일행은 무슨 일인가하여 행렬을 멈추었다. 인마를 이끌고 온 자는 관옥(冠玉)과 같은 용모를 지닌 준수한 미청년이었다. 청년은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형님!"
"오! 자네는 주유(周瑜)가 아닌가!"
손책은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주유를 와락 끌어안았다. 주유는 여강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그와 각별하게 지내며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두 사람은 나이가 같았으나 손책의 생일이 조금 빨라 주유가 형님으로 모셔오고 있었다.
"형님께서 대업을 도모키로 했다는 말을 들고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왔습니다."
주유의 말에 손책은 미간을 활짝 폈다.
"역시 자네답군. 단숨에 내 뜻을 간파했군 그래!"
사실 그가 수춘을 떠난 것은 대외적으로는 외숙 오경을 구하러 간다는 명목을 내세운 것이었다. 비록 백자천경에 눈이 멀긴 했지만 원술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주유는 단번에 손책의 내심을 간파한 것이었다.
손책은 너무나 기분이 좋아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ㆍㆍㆍㆍㆍㆍ! 자넬 만났으니 대업은 이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네."
그는 주유를 주치, 여범 등에게 소개한 후 행렬을 출발시켰다. 손책과 주유는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행진하며 그동안의 행적들에 대해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두 사람은 대화 중에 간간히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참, 강동에 이장(二張)이 있다는 말을 들으셨습니까?"
"이장이라니?"
"한 사람은 장소(張昭)란 인물이고 또 한 사람은 장굉(張紘)입니다. 그 두 사람은 천하를 경략할만한 인재들인데 환란을 피해 이 근처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형님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런 인재들이라면 어찌 마다하겠는가?"
손책은 기뻐하며 즉각 사람을 시켜 두 사람에게 예물을 보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소와 장굉은 그의 청을 사양하며 예물을 돌려보냈다. 손책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직접 그 두 사람을 찾아갔다.
손책은 몸을 낮추어 그들에게 정중히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했다. 장소, 장굉은 어지러운 세상에 환멸을 느껴 은둔한 처사들이었으므로 금은보화 따위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손책의 인품과 용자를 대면하니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두 은자는 결국 손책의 정성에 감복하여 따라나서게 되었다.
이로써 손책은 날개를 단 셈이 되었다. 그는 주유, 주치, 여범, 장소, 장굉 등과 함께 양주의 유요를 칠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한편 유요는 손책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히 수하들을 소집했다.
"무슨 방책이 없겠느냐?"
수장 장영(張英)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불초가 우저(牛渚)로 가서 놈을 막겠습니다.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장중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소생이 선봉장이 되겠소이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인물은 다름 아닌 태사자(太史慈)였다. 태사자는 북해에서 공융의 위험을 구해준 후 유요에게로 왔다가 지금까지 눌러앉아 있는 상태였다.
유요는 눈살을 찌푸렸다. 좌중에서 간신히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태사자의 태도가 지나치게 당돌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너는 아직 어려 선봉을 삼을 수 없다. 내 곁에서 명을 기다리도록 해라."
태사자는 공개적으로 면박을 당하자 얼굴을 붉히며 주저앉고 말았다.
장영은 유요의 명을 받고 1만 명의 정예무사들을 이끌고 우저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며칠 후 손책이 당도하자 그는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책의 나이가 어린데다 병력이라고 해야 수천 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거드름을 피우며 상대를 향해 호통 쳤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쳐들어 온 거냐!"
손책은 분노를 금치 못해 당장 달려 나가려 했다.
"주공은 가만히 계십시오. 저런 놈은 이 늙은이로도 충분합니다."
황개가 만류하더니 철편을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장영도 노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어울려 싸우려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