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악!
"으아악"
수백 명의 시선이 지켜보는 가운데 곤장이 떨어졌다. 여포라면 이름만 들어도 혈압이 오르는 장비였기에 매질에 추호의 사정도 봐주지 않았다. 장비는 곤장 50대를 다 채우고서야 주위의 만류에 못이기는 척 조표를 풀어주었다.
조표는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연회가 파한 후 집으로 돌아간 그는 도저히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인편을 통해 소패에 있는 여포에게로 한 통의 서신을 보냈다. 서신에는 오늘 있었던 일을 자세히 적고 유비가 서주를 떠나고 없으니 기습을 하면 서주를 장악할 수 있노라고 썼다. 물론 자신이 보문을 열어두겠다는 내용도 적었다.
한밤중에 서신을 받은 여포는 진궁을 불러 의논했다.
"소패는 오래 머물 곳이 못됩니다. 지금이야말로 서주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진궁의 말에 여포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먼저 500명의 무사들을 거느리고 서주로 향해 달렸다. 또한 진궁과 고순으로 하여금 남은 무사들을 대동하고 뒤 따르도록 지시했다.
서주와 소패는 지척지간이라 여포는 사경 무렵에 서주에 당도했다. 과연 문루 위에는 조표가 수하들과 함께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조표는 여포를 보고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여포와 그의 수하들은 거침없이 문을 통과하여 보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한편 술에 취한 장비는 세상모른 채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불현듯 바깥이 시끌벅적해지더니 누군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큰일 났습니다! 여포가 쳐들어왔습니다!"
"뭐라고!"
장비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는 부리나케 옷을 걸쳐 입고 장팔사모를 둘러맨 채 달려 나갔다. 문 앞에 묶어둔 말에 뛰어올라 밖으로 나가자 여포의 수하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이 비열한 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쳐들어 온 거냐!"
천둥 같은 고함을 내지르는 장비를 보고 여포의 수하들은 찔끔하며 주춤거렸다. 장비는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술이 만취한 상태라 무위를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여포의 수하들 역시 그를 두려워하여 거리를 두고 간간히 응수할 뿐이었다.
그 때였다.
"틀렸습니다. 일단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문득 십여 기의 인마가 여포의 무리를 헤치며 달려왔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장비를 따르던 수하들이었다. 장비는 피를 토할 정도로 격분했지만 사방이 온통 여포의 수하들로 새까맣게 덮인 터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술에 취해 몸조차 가누기가 힘들었다.
결국 그는 수하들에게 둘러싸인 채 무사히 서주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다급한 나머지 그는 유비의 식솔들을 챙기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한편 장비가 달아나는 것을 지켜보던 자가 있었으니 억울하게 곤장을 맞았던 조표였다. 조표는 장비를 따르는 무사들이 고작 20명도 안되는 것도 보고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저 놈을 죽여야겠다! 날 따르라!"
그는 백여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장비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문루를 나서 한참을 쫓아가는데 장비가 뒤를 돌아보더니 말을 거꾸로 돌려 달려왔다.
"내 네 놈만은 기필코 죽여 버려야겠다!"
조표도 이쯤 되면 물러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장비는 만취한 상태라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오산이었다. 격돌한지 3합 만에 그는 적수가 못됨을 느끼고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라, 이 놈!"
장비는 이를 갈며 조표를 쫓아갔다. 조표는 혼비백산한 채 죽을힘을 다해 달아났지만 강가에 이르렀을 때 그만 장비에게 잡히고 말았다. 윙! 하는 소리를 들었다싶은 순간 장비가 내지른 창에 그의 몸은 등과 복부가 꿰뚫려버리고 말았다.
"카악! 더러운 놈!"
장비는 조포의 시신을 강물로 던져버린 후 돌아섰다. 그 즈음 서주로부터 도망쳐 나온 무사들이 속속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서주는 이미 여포의 손에 떨어진 후였고 얼마 안 되는 무사들의 힘으로 서주를 탈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후 수하들과 함께 유비가 있는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서주는 물론 유비의 식솔들마저 잃어버렸으니 그는 자신의 머리통을 부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편 여포는 손쉽게 서주를 장악한 후 100여 명의 무사들로 하여금 유비의 식솔들이 기거하고 있는 내전을 엄중하게 지키도록 했다. 그 동안 유비가 베풀어주었던 은덕을 생각해서라도 최소한 가족들만은 예우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장비는 유비가 진을 치고 있는 곳에 당도했다. 유비는 수백 명에 불과한 무사들을 이끌고 온 그를 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아니? 서주는 어찌하고 이 곳에 온 거냐?"
"형님ㆍㆍㆍㆍㆍㆍ."
장비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그간에 일어났던 일들을 고했다. 유비는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 식경이나 지난 후에야 그는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얻었을 때도 기쁘지 않았거늘 다시 잃었다 한들 아까울 것도 없지."
장비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때 관우가 불쑥 물었다.
"그럼 형수님들은 어찌 되었는가?"
장비의 고개는 더욱 아래로 떨어졌다.
"그냥 그 곳에 계시오."
관우의 눈이 부릅떠졌다.
"뭣이? 형수님들을 버려두고 너만 도망쳐왔단 말이냐?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냐?"
관우는 기가 막혀 손가락으로 장비를 가리키며 노성을 발했다.
"네가 서주를 지킨다고 했을 때 형님이 뭐라고 말씀했느냐? 그런데 네 놈이 우겨서 맡겼더니 형수님들마저 놈의 손에 떨어지게 했으니 네 놈이 과연 사람이란 말이냐!"
장비의 무참한 심경이야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장비는 갑자기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그으려했다.
"무슨 짓이냐!"
깜짝 놀란 유비가 신형을 날려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던져버렸다.
"놔두시오! 나 같은 놈은 죽어도 싸단 말이오!"
장비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외치자 유비는 그를 껴안으며 말했다.
"옛말에 형제는 수족과 같고 처자는 의복과 같다고 하지 않았느냐? 의복이야 낡으면 갈아입을 수 있지만 손발이 끊어지면 다시 이을 수 없지 않느냐? 너와 나, 운장이 도원에서 결의할 때 비록 한 날 한 시에 태어나진 못했어도 죽을 때는 함께 죽자고 천지신명께 맹세했다. 비록 서주를 잃고 가족마저 잃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어찌 아우와 비교하겠느냐?"
유비의 음성은 부드러우면서도 절절했다.
"게다가 서주는 본래 내 것도 아니었다. 가족들이 여포의 손에 떨어졌다고는 해도 그가 함부로 해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차후에 얼마든지 구해낼 수 있을 것이네. 자네가 비록 실수를 했다지만 그 만한 일로 목숨을 버리려 하다니 그게 어디 될 말이냐?"
장비는 털썩 무릎을 꿇더니 대성통곡을 했다. 옆에 서있던 관우도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유비는 장비의 어깨를 감싸 일으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그만 진정하게. 우리 삼형제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원히 함께 할 사람들일세."
그 광경을 바라보던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감동하여 숙연해지고 말았다.
한편 원술은 여포가 서주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러면 그렇지! 여포란 놈은 본래부터 의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놈이었거든.'
그는 곧바로 서찰을 써 여포에게 보냈다. 서찰의 내용은 양곡 5만석과 말 500필, 금은 1만량, 비단 1000필을 줄 테니 힘을 합하여 유비를 치자는 것이었다.
원술의 제의를 받은 여포는 갈등을 금치 못했다. 의리를 생각하면 단호히 뿌리쳐야했지만 그에게는 양곡과 마필 등 모든 것들이 아쉬운 판국이었다. 특히 조조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몇 배나 세를 불려야했다. 결국 그는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고순에게 유비의 배후를 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소식은 곧바로 유비의 귀로 들어갔다. 장비가 도망쳐왔을 때부터 그가 우려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서주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쏴아아ㆍㆍㆍㆍㆍㆍ!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유비는 폭우를 맞으며 무사들과 함께 광릉(廣陵) 쪽으로 떠나버렸다. 고순이 그 곳에 당도했을 때 유비가 진을 치고 있던 곳은 텅 비어 있었다. 고순은 한 발 늦었음을 아쉬워했지만 그렇다고 빈손으로 서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기령을 만나 약속한 물품을 달라고 말했다.
"공은 일단 돌아가시오. 내가 주공을 만나 전하겠소이다."
고순은 기령의 말을 믿고 서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포는 이제나 저제나 물품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때 원술이 한 통의 서찰을 보내왔다. 그런데 서찰의 내용은 그의 기대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즉, 고순이 오기는 왔지만 유비를 제거하지 못했으므로 차후 유비를 제거했을 때 약속한 물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여포는 분노를 금치 못해 부르짖었다.
"그 놈이 날 속였구나! 내 가만 있을 줄 아느냐?"
여포는 유비와의 의리를 저버리고 원술의 제의에 응했는데 이용만 당했다고 생각하니 이만저만 화가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장 남양으로 쳐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진궁이 나서서 그를 만류했다.
"안 됩니다. 원술은 물자가 충분한데다 막강한 무사들을 거느리고 있어 쉽게 이길 수 없습니다. 차라리 유비와 손을 잡는 것만 못합니다."
여포는 흠칫했다.
"유비와 손을 잡는다고?"
"유비를 소패로 청해 그 곳에 머물게 하면 자연히 우군이 되어 날개를 얻는 격이 됩니다. 또한 그를 선봉으로 삼아서 원술을 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연후에 원소만 제거하게 되면 손쉽게 천하를 장악할 수 있습니다."
여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좋은 계책이네. 내 자네 말대로 하겠네."
여포는 즉시 서찰을 써 유비에게로 보냈다. 한편 유비는 새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광릉으로 향했지만 도중에 원술에게 기습을 당해 태반이나 무사들을 잃은 상황이었다. 마침 그 때 여포의 사자가 당도했다.
사자가 갖고 온 서찰을 읽은 그는 기쁨을 금치 못했다.
"역시 여공이 날 버리지 않았군."
그 말에 관우와 장비가 동시에 외쳤다.
"그 놈은 믿을 수 없는 놈이오!"
그러나 유비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호의를 갖고 날 맞아들이려 하는데 어찌 의심한단 말인가?"
그는 두 아우의 만류를 뿌리치고 무사들을 이끌고 서주로 향했다. 일행이 서주 근교에 달했을 때 백여 명의 무사들이 두 대의 마차를 호위하며 마중을 나왔다. 알고 보니 여포가 유비의 두 부인과 식솔들을 보내온 것이었다.
유비는 식솔들이 무사한 것을 보고 아우들에게 말했다.
"내 뭐랬느냐? 여포는 신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네."
유비는 식솔들로부터 그 동안 여포가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는 말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직접 가서 사의를 표해야겠네."
"가려면 형님이나 가시오. 난 안 가겠소이다."
장비는 여포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죽으면 죽었지 찾아갈 생각이 없었다. 유비는 그에게 식솔들을 데리고 먼저 소패로 가있으라고 하고 몇몇 무사들만 이끌고 서주로 향했다.
"내 서주를 취하려 했던 것은 아니오. 다만 익덕공이 술에 취해 함부로 사람을 죽이려 하니 더 큰 사고가 날까봐 잠시 맡아서 지켰을 뿐이외다."
여포는 유비를 맞이하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하지만 유비는 한 술 더 떴다.
"불초는 본래부터 여공께 서주를 드리려 했으니 그런 말씀 하시지 않아도 되오이다."
여포는 다시 한 번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아니오, 이제 그만 서주를 돌려드릴까 하오."
"허허! 무슨 말씀을. 불초는 이만 소패로 돌아갈까 합니다."
유비는 극력 사양을 하고 수하들과 함께 소패로 돌아갔다. 그가 서주를 떠나는 순간 여포의 입이 귀밑에 걸린 것은 당연지사였다.
유비는 다시 소패에 머물게 되었다. 소패를 서주와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관우와 장비는 서주를 뺐기고 손바닥만한 소패에 주저앉게 된 것에 대해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론 여포에게 향한 분노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비의 마음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사람은 분수를 지키며 살아야하네. 때를 알고 굽힐 때는 굽히면서 기다리다보면 언젠가는 길이 열리는 법이지."
이후 여포는 소패에 있는 유비에게 간간히 물품을 보내주기도 하며 호의를 베풀었다. 유비 또한 여포의 뜻을 받아들여 한동안 양측은 화목한 사이로 지내게 되었다.
기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한 산에서 서로 싸우지 않고 살기는 힘든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특별한 동거(同居)는 한동안 유지되었다. 그것은 유비라는 호랑이가 아직까지 이빨을 드러내지 않고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