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밤 만총은 양봉의 수하로 변복하고 몰래 적진으로 잠입했다. 그는 한동안 헤맨 끝에 서황의 막사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서황은 막사 한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생각에 잠긴 듯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만총은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누구냐?"
서황은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그간 안녕하시었소?"
서황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는가 싶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게 누구요? 만공이 아니오?"
만총은 서황의 손을 잡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 할 말이 있어 죽을 각오를 하고 공을 만나러 왔소이다."
서황은 그에게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온 것이오? 말씀해 보시구려."
만총은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의 용맹과 빼어난 신공절학이 만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거늘 어찌하여 양봉과 같은 소졸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지 안타까운 마음에서 찾아왔소이다. 내가 모시는 천원대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대의 영웅으로 지혜로운 자는 우대하고 호걸은 널리 포용하시는 분이시오. 낮에 대공께서 서공의 무위를 보시고는 흠모하는 마음이 들어 차마 수하로 하여금 사생결단을 내지 못하게 하셨소이다. 아울러 날 보내 공을 청해오도록 당부하셨소. 그러니 공은 이번 기회에 새롭게 주군을 모시고 대업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소?"
서황은 한동안 멍한 표정이었다. 만총의 유창한 언변도 언변이려니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마음을 겉잡을 수 없이 흔들었던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도 양봉이 큰 그릇이 아님을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장부가 어찌 한번 모신 주군을 버린단 말이오?"
만총은 더욱 열기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자고로 영리한 새는 나무를 가려 깃들고 현명한 신하는 주인을 선택하여 섬긴다고 하였소. 하물며 섬길만한 주인을 만나고도 그 기회를 놓친다면 진정한 장부가 아닐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황은 벌떡 일어서며 포권했다.
"날 깨우쳐 주셔서 고맙소. 내 공의 말을 따르리다."
만총은 뛸 듯이 기뻤다. 그는 내친 김에 욕심을 냈다.
"기왕에 뜻을 정했다면 양봉과 한섬의 목을 가지고 가는 것이 어떻소? 천원대공을 뵙는데 이보다 큰 선물은 없을 것이오."
서황의 안색이 이내 굳어졌다.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내 중도에 뜻을 바꾸기는 하나 그렇다고 불의한 짓을 저지를 수야 있겠소? 그럴 수는 없소이다."
만총은 찔끔하여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공이야말로 진정한 사나이요. 그럼 지금 떠납시다."
서황은 자신을 따르던 직계수하 수십 명만을 대동하고 어둠을 틈타 진중을 빠져나갔다. 이 소식은 곧 양봉의 귀에 들어갔다. 양봉은 크게 노해 몸소 수하들을 데리고 추격해갔다.
"배신자 서황은 멈추어라!"
얼마 후 양봉은 서황 일행을 발견하고 노성을 외치며 바짝 쫓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함성이 울리더니 사방으로부터 화살이 우박처럼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상황을 예견한 조조가 미리 수하들을 매복시켜 두었던 것이었다.
급습에 놀란 양봉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했다. 그는 말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지만 이미 퇴로마저 차단되어 있었다. 바로 그 때 한섬이 무사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한섬은 조조의 무사들을 배후에서 쳤다. 양측은 한데 어울려 혼전을 벌이게 되었다. 양봉과 한섬을 그 틈을 타 간신히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기회를 놓칠 조조가 아니었다. 그는 차제에 양봉과 한섬을 박멸시킬 작정을 하고 무사들을 몰아 세찬 공세를 펼쳤다. 워낙 강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양봉과 한섬의 무리들은 태반 이상이 죽거나 항복을 하고 말았다.
양봉과 한섬은 고작 수백 명의 수하들만 대동한 채 달아나고 말았다. 그들은 무황성으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북무림의 패주인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는 수밖에 없다도 생각한 것이다.
조조가 진중으로 돌아오니 만총이 서황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서황을 위해 대대적인 환영연을 베풀었다.
그가 서황을 아끼는 마음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연회가 벌어지는 동안 내내 서황의 어깨를 두드리며 허저, 전위와 함께 그가 자신의 수호신이 되어야 한다고 몇 번씩이나 다짐을 받고 있었다. 예상 밖의 뜨거운 환대를 받은 서황은 그저 감격을 금치 못할 따름이었다.
조조는 마침내 허도에 당도했다.
조조는 무황성을 재건하노라 무림에 공표한 후 일사천리로 역사(役事)를 진행시켜나갔다. 그는 주도면밀한 위인이었다. 대역사를 치르는 한편 공적을 가려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엄정하게 베풀어 수하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런가하면 무황성의 제도와 직제를 개편해 나갔다.
무황 유협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조조는 유협을 앞세워 무림각지로 표문을 돌려 무황성에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하며 본격적으로 섭정(攝政)에 들어갔다.
그는 순욱을 대사령(大司令)으로 삼고 순유와 곽가는 쌍군사(雙軍師)에 임명했으며 유엽, 모개, 임준, 정욱, 범성, 동소, 만총 등에게는 각각 무황성의 권한을 시행하는 요직을 내렸다.
하후돈과 하후연, 조인, 조홍에게는 무후(武侯)에 해당하는 작위를 내렸으며 여건, 이전, 악진, 우금, 서황에게는 오대천장(五大天將)의 직위를, 허저와 전위는 각각 천지쌍위(天地雙衛)란 직위를 내려 자신을 보위토록 했다. 그 밖의 수하들에게도 모두 직위를 내려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로써 무황성의 대권은 송두리째 조조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제 그의 말 한 마디에 무림천하가 부복하게 된 것이다. 그의 치밀한 전략과 용병술에 의해 무림의 판도는 빠르게 재편되었다. 또한 무황성은 철옹성(鐵甕城)이 되어 무황 유협은 다시는 외세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다만 무황성의 대소사가 직접 무황에게 전달되는 일은 사라지고 말았다.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은 반드시 조조에게 먼저 보고 되고, 그의 윤허를 받은 연후에야 무황에게 전해지곤 했다. 바야흐로 천원대공 조조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