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양봉과 한섬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그 출신으로 인해 닮은 점이 있었으므로 진작부터 친하게 지내던 터였다.
"이제 조조가 큰 공을 세웠으니 무황폐하를 등에 업고 무림을 좌지우지할 게 뻔하오. 그 작자는 본래 사람을 가린다는 소문이 있소이다. 그런 작자가 우릴 가만 두겠소?"
"내 생각도 그렇소이다."
한 사람은 이각의 수하요, 한 사람은 흑도 출신이었다. 쟁쟁한 무림명가 출신인 조조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은밀히 뜻을 합친 후 유협에게 아뢰었다.
"이각과 곽사가 패해 달아났다고 하나 아직 살아있어 후환이 두렵습니다. 옛말에도 잡초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이듬해 다시 살아난다 하였습니다. 하니 신들이 쫓아가 그들의 수급을 베어 오겠습니다."
유협은 난처한 표정으로 동승을 바라보았다. 유협 또한 바보가 아닌 이상 그들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동승도 양봉과 한섬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는지라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양공과 한공께서 본성의 화근을 제거하겠다고 하시니 윤허하심이 옳은 줄로 압니다."
유협은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승낙했다.
"두 분의 무운을 빌겠소이다."
양봉과 한섬은 엎드려 절을 한 후 자신들의 수하들을 이끌고 무황성을 떠났다. 이각, 곽사를 제거하겠다고 말한 것은 물론 핑계에 불과했다. 그것은 오직 목숨을 구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대량(大梁)을 향해 달려갔다.
조조가 성밖에 진을 치고 머물고 있었으므로 유협은 대사를 논의할 때면 가신을 보내 전갈하곤 했다. 어느 날 조조는 유협이 보낸 가신을 맞이하다가 괴이한 느낌이 들었다.
'가신들이 모두 궁핍한 생활을 하느라 낯빛이 누렇고 행색이 말이 아닌데 이 자는 어찌 이리도 낯빛이 붉고 생기가 돈단 말인가?'
조조는 궁금함을 참는 자가 아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대의 얼굴에 윤기가 돌고 눈빛이 밝으니 무슨 특별한 대법이라도 익혔소?"
그러자 중년의 가신은 공손히 포권하며 말했다.
"특별한 대법이랄 것이야 있겠습니까마는 수십 년 동안 채식(菜食)만 하면서 선문(仙門)의 토납공(吐納功)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조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황성의 가신으로 삼식을 산해진미와 함께 하였을 터인데 채식만 하다니, 그것만 해도 놀랍거늘 토납공으로 심신을 단련했다니 그대의 정력(定力)이야말로 대단하구려!"
"과분한 말씀입니다."
조조는 의자에서 내려와 중년인의 손을 잡고 물었다.
"존명을 물어봐도 되겠소?"
중년인은 안색이 변했다. 천하의 2인자, 아니 실질적인 1인자라고 할 수 있는 천원대공이 설마 이렇게까지 자신을 공경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히 말했다.
"소생은 제음 출신으로 동소(董昭)라고 합니다."
조조는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대 같은 고인을 만나게 된 것은 나의 행운이오. 장차 함께 큰일을 도모할 날이 있기를 바라오."
조조는 사람을 알아보는 뛰어난 안목을 지니고 있을 뿐더러 한번 눈에 든 인물은 반드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야 만다. 그는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또한 기다릴 줄도 아는 인물이었다. 동소는 숨은 보석과도 같은 인물로 정작 무황성에서는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조조의 눈에 띰으로써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된 셈이었다.
조조는 동소를 진중에 머물게 하면서 순욱을 불러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3인이 한참 대화에 열중하는데 양봉과 한섬이 무리들을 이끌고 무황성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조조는 냉소하며 말했다.
"날 의심해서 달아나는 것이로군."
동소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하잘 것 없는 자들이니 마음에 두실 일이 아닙니다."
조조는 탐색하듯 물었다.
"이각과 곽사가 살아있는데 다시 도모하지 않겠소?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범에게 발톱이 없고 새에게 날개가 없는 격이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머지않아 공께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으핫핫핫핫ㆍㆍㆍㆍㆍㆍ!"
조조는 느닷없이 대소를 터뜨렸다. 순욱은 흠칫하며 조조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웃던 조조는 다시 동소를 향해 물었다.
"그대는 날 위해 지낭을 하나 풀어줄 수 있겠소? 귀를 씻고 경청하리다."
동소의 눈은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맑았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고요한 눈빛으로 한동안 조조를 바라보던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금의 무림은 주(周)나라 때 오패(五覇)가 황실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때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공께서 먼저 본성을 차지하였으나 그로인해 사패 또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 곳에 오래 머물러 계신다면 필경 예상치 못한 난국이 파생할 것입니다."
조조의 안색이 신중해졌다. 순욱도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따라서 폐하를 모시고 허도(許都)로 가시는 것이 상책 중의 상책입니다. 다만 폐하께서 흉적에게 쫓기던 끝에 어렵게 안주하신 터라 주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비상한 자야말로 비상한 일을 행하는 법이니 공은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ㆍㆍㆍㆍㆍㆍ."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단 3인밖에 없는 자리였으나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좌중을 짓눌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조는 덥석 동소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대는 내 심중을 정확히 간파하였소. 하지만 양봉이 근처에 있고 가신들이 에워싸고 있으니 자칫 변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오. 좋은 수가 없겠소?"
동소는 말은 청산유수처럼 막힘이 없었다.
"쉬운 일입니다. 양봉에게는 예물과 함께 서신을 보내 안심시키고 가신들에게는 이 곳에서 무황성을 재건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십시오. 반면 허도에는 물자와 인력이 풍부하여 금명간에 무황성을 복원할 수 있다는 명분을 세우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가신들도 흔쾌히 따를 것입니다."
조조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는 동소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듣고 보니 머리가 탁 트이는 기분이오. 내 그대의 계를 따르리다."
동소는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앞으로도 공은 날 도와줘야겠소이다."
조조는 동소를 치하한 후 몸소 진영 밖까지 나가 그가 돌아가는 길을 배웅해 주었다. 동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조조의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마치 진흙 속에 묻혀있던 진주를 발견한 기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