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그게 사실이냐?"
유협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부르짖었다. 이각과 곽사가 낙양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그는 가신들을 둘러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조조에게 보낸 사자는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흉적들이 쳐들어온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가신들도 공포에 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때 양봉과 한섬이 나서더니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신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놈들을 물리치겠습니다."
유협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양봉은 본래 이각의 수하였다. 게다가 한섬은 흑도 출신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는 것이 아닌가? 유협은 문득 부끄러움을 느꼈다. 명색이 무황인 자신이 이토록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그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이 때 동승이 나서며 말했다.
"공들의 충심은 가상하나 그리 좋은 계책은 아니외다."
가신들의 눈길이 일제히 동승에게 향했다.
"본성이 폐허나 다름없는데다 무사들 또한 절대부족이오. 지금은 의기를 내세울 때가 아니외다. 설령 목숨을 바쳐 싸운다고 해봐야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할 것이오. 차라리 폐하를 모시고 산동으로 피신함만 못할 것이오."
산동은 조조가 있는 곳이다. 가신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방책이기 때문이었다. 가신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유협에게로 향했다. 유협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동공의 말이 옳소. 산동으로 떠날 채비를 차리시오."
낙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일행은 다시 짐을 꾸려 떠나게 되었다. 유협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돌아보며 연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고작해야 몇 백 명 정도였다. 이 정도의 수하들을 거느리고도 과연 무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협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 때였다.
멀리서 북소리가 울리는 것이 아닌가? 일행은 깜짝 놀라 행렬을 멈추고 말았다. 맞은편 언덕으로부터 황진이 자욱이 피어오르더니 이내 무수한 인마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아! 놈들이 벌써 쳐들어 왔단 말인가?'
유협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내심 절망의 탄식을 발하고 말았다.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더 달아날 곳도 없는 터라 그들은 그저 넋을 잃은 채 구름처럼 밀려오는 인마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폐하!"
앞장 서 달려온 중년인이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절을 했다. 유협은 눈을 크게 떴다. 알고 보니 그가 조조에게 보냈던 사자였던 것이다.
"폐하, 산동의 조대공께서 곧 당도하실 겁니다. 조공께서는 흉적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에 먼저 하후돈을 보내셨습니다."
유협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과연 뒤이어 당도한 인마들은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이루며 무황 일행을 보호하듯 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어 하후돈을 비롯하여 허저, 전위 등이 차례로 나서며 절을 했다.
"폐하를 뵈옵니다!"
유협은 그들의 배례를 받으며 감격을 금치 못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한 떼의 인마가 달려오더니 조홍, 이전, 악진 등이 말에서 뛰어내려 절을 올린다.
"조대공께서 행여 선봉대가 흉적들을 당하지 못할까 근심하여 신들을 다시 보냈사옵니다."
조홍의 말에 유협은 더욱 감동하여 치하해 마지않았다.
"내 일찍이 조공의 의기가 하늘을 찌른다는 말을 들었소. 이렇듯 날 위해 배려를 아끼지 않으니 고맙기 한량없구려."
무황일가는 조조의 무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게 되었다. 가신들도 비로소 가슴을 활짝 펼 수 있었다. 그런데 일행이 얼마쯤 전진하였을 때 앞장 서 가던 무사들 중 한 명이 달려와 보고했다.
"이각과 곽사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유협은 하후돈을 바라보았다. 하후돈은 우렁찬 음성으로 말했다.
"명만 내리십시오. 신이 흉적들을 도륙하겠습니다!"
유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무사들을 두 대로 나누어 반도들을 소탕하도록 하시오."
명이 떨어지자 하후돈과 조홍은 각각 무사들을 거느리고 달려 나갔다. 승부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조조의 수하들은 오랜 시간동안 조련된 정예고수들이었으나 이각과 곽사의 수하들은 어중이떠돌이들을 규합한 터라 적수가 못되었다. 양측이 격돌한지 얼마 안 되어 이각, 곽사는 크게 패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하후돈과 조홍은 더 이상 그들을 쫓지 않고 돌아와 말했다.
"조대공께서 곧 당도하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폐하를 다시 낙양으로 모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유협으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일행은 다시 낙양의 무황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후돈은 유협을 무황성에 모신 후 성밖에 진을 치고 조조가 오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 북소리가 울리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마가 무황성으로 몰려왔다. 그것을 본 유협은 탄성을 금치 못했다.
"오오! 과연 대단한 위용이로다."
인마는 무황성 밖에 진을 치고 있던 무사들과 합류하였다. 유협이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중 마침내 조조가 모습을 보였다. 조조는 옹색한 대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폐하, 그간 얼마나 고초가 많으셨습니까?"
유협은 벌떡 일어나 달려가 조조의 손을 잡고 울먹였다.
"공을ㆍㆍㆍ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조조는 엄숙하게 말했다.
"신은 한시라도 폐하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제야 달려온 신을 벌하여 주십시오."
유협은 황급히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공이 아니었다면 난 이미 구천을 떠도는 혼령이 되어있었을 것이오."
유협은 실로 오랜만에 안색을 활짝 펴며 말했다.
"이제는 조공만 믿겠소. 부디 무황성을 위해 날 지켜주기 바라오."
조조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스쳤으나 유협은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유협은 조조에게 천원대공(天元大公)이란 작위를 내림으로써 전폭적으로 그를 신임했다. 조조는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막대한 물품과 식량을 풀어 무황가의 궁색함을 단번에 해소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