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된 무황성을 바라보는 유협의 눈에서 겉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것이ㆍㆍㆍ 무황성이란 말인가?"
무황성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화려하고 웅장했던 대전이나 성벽은 간 곳이 없고 불에 타 무너져 내린 잔해들만 을씨년스럽게 널려 있을 뿐 그 나마 키를 넘는 잡초들이 온통 뒤덮고 있었다.
장안에서 이 곳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던가? 그러면서도 무황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에 의지했었다. 그러나 유협을 반기는 것은 잿더미가 된 잔해와 무성한 잡초뿐이었다.
"으흐흐ㆍㆍㆍ 어흐흐ㆍㆍㆍㆍㆍㆍ."
유협은 바닥에 쓰러져 목 놓아 울었다. 그를 바라보는 동승, 양봉을 위시하여 가신들의 심정 또한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그들도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통곡을 금치 못했다.
과연 폐허가 된 무황성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유협은 물론 가신들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폐허 한 가운데 무황이 거처할 옹색한 집을 한 채 짓고 가신들은 그저 잡초 사이에 간신히 이슬을 피할만한 막사를 세웠다.
폐허 속에 가재도구 따위가 남아있을 리 없었다. 아니, 하루를 연명할 식량조차 구하기가 힘들었다. 이각, 곽사에게 쫓기면서 무황가가 지니고 있던 금은보화를 몽땅 잃어버린 탓으로 식량을 사들일 형편조차 안 되었다. 그나마 유협 부부에게는 어렵사리 먹을 것을 구해 올렸으나 가신들이나 무사들은 그야말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야만 했다.
유협은 허기와 피로로 안색이 누렇게 뜬 가신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아아! 모두가 내가 못난 탓이오. 그대들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럽구려."
양표가 부복하며 말했다.
"폐하, 이 상태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더구나 흉적 이각과 곽사가 쳐들어오면 그나마 본성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협은 근심에 찬 어조로 물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일전에 거론되었던 조조에게 사자를 보내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라면 반드시 폐하를 받들어 모실 것입니다. 그에게 본성을 재건하도록 첩지를 내리십시오."
유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찌 마다하겠소? 당장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도록 하시오."
"ㆍㆍㆍㆍㆍㆍ."
자미성(紫微星)을 바라보는 조조의 안광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간혹 잠을 이루지 못할 때마다 언덕에 올라 야천을 바라보곤 했지만 오늘따라 예사롭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는 천기(天機)를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가물거리는 자미성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왜지? 오늘따라 자미성의 빛이 흐리기만 하니ㆍㆍㆍㆍㆍㆍ.'
자미성은 제왕(帝王)의 성좌다. 자미성이 밝게 타오르면 제왕의 기운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그 빛이 흐려지면 제왕의 기운이 쇠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아무나 자미성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기를 엿볼 수 있는 혜안을 지닌 자에게만 그 빛이 보이는 것이다.
- 때가 아닙니다. 기다리셔야 합니다.
곽가만큼 그의 심중을 잘 파악하고 있는 자는 없었다. 어느 날 그가 자미성의 기운을 관찰하고 있을 때 곽가가 불쑥 그런 말을 했다. 조조는 소스라치게 놀라 반문했다.
-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 주공의 가슴 속에 품은 뜻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 내 가슴에 품은 뜻?
- 기다리셔야 합니다.
조조의 손이 허리춤의 보검 자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입 한 번 잘못 벙긋했다가는 어렵게 쌓아올린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무황성을 재건하겠노라 무수히 공언해왔다. 한 개인의 야망이 아니라 무림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는 의기 하나로 기라성 같은 기인이사들을 모아 지금의 거대한 세력을 만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야망을 만천하에 드러낸다면 과연 자신을 따를 자가 몇이나 될지 자신이 없었다.
- 그래서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곽가의 표정은 일점의 동요도 없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뇌라도 절개해 확인해보고 싶다. 조조의 눈에서 살기가 번쩍였다. 곽가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 얼마나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 곧 그 때가 올 것입니다.
조조는 자신의 내심을 꿰뚫어 보는 곽가에 대해 일말의 두려움마저 느꼈다. 하지만 그는 조급증을 참기가 힘들었다. 무황 유협이 낙양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얼마 전 접했기 때문이었다. 유협에게 무황성을 지킬만한 힘이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만일 이각, 곽사가 낙양을 친다면 무황은 다시 그들의 손에 떨어질 게 뻔한 일이다.
어디 그 뿐인가? 북쪽에 있는 원소나 공손찬이 먼저 손을 쓸지도 모른다. 게다가 남쪽에는 야심만만한 원술과 여포도 있다. 그들이 선수를 쳐 무황성을 손에 넣는다면 기회는 영영 멀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조는 군사들을 불러 넌지시 운을 떼어 보았다.
"무황께서 지금 낙양에 머물러 계시는데 알다시피 무방비 상태라 걱정이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떻소?"
기다렸다는 듯이 순욱이 나서서 말했다.
"영웅은 때를 아는 법입니다. 무림천하가 어지러운 지금 무황이 고립되어 있으니 주공께서는 낙양으로 달려가 무황을 보위하셔야 합니다. 남보다 한 발 앞서야 장차 대업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조조의 안색이 환해졌다. 순욱의 말이야말로 그가 기다렸던 말이었다.
"옳은 말이오. 당장 낙양으로 달려가야겠소."
그는 힐끗 곽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곽가는 먼 곳을 보고 있을 뿐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때였다.
"폐하께서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느닷없는 전언에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조조는 사자를 맞아 예를 갖춘 후 첩지를 받들어 읽었다. 첩지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