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 양봉은 화음에 도착해 진을 친 후 무황 일가와 식솔들을 편히 쉬도록 했다. 그러나 달콤한 휴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튿날 곽사가 직접 무리들을 이끌고 쳐들어온 것이었다. 곽사의 무리는 들판을 새까맣게 덮을 정도로 많았다.
유협은 양봉과 서황의 손을 잡고 침중하게 말했다.
"짐은 오직 그대들만 믿겠소."
양봉이 진을 지키고 서황이 도끼를 치켜든 채 달려 나갔다. 하지만 상대는 곽사였다.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곽사는 상대의 전력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진형을 나눠 한편으로는 서황을 맞아 싸우며 고립시키고 자신은 양봉이 지키는 진영을 몰아쳐 포위해 버리고 말았다.
양봉은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되어 몰살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무황을 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태에서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 때였다.
"와아아!"
돌연 동남방(東南方)으로부터 함성이 울리더니 일단의 무리들이 달려와 곽사의 무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배후로부터 뜻밖의 습격을 받은 곽사는 대패하여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동남방에서 무리를 이끌고 달려온 인물이 유협을 알현했다.
"신 동승(董承)이 폐하를 뵈옵니다."
동승은 유협의 외척으로 유협을 구하기 위해 부랴부랴 무인들을 규합하여 달려온 것이었다. 유협은 환난 중에 혈육을 만나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것을 본 동승은 더욱 가슴이 아팠다. 지난날 무황가의 위엄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가 아니었는가! 그런데 지금은 고작 이각, 곽사 따위에 휘둘려 한낱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해버리지 않았는가.
동승은 바닥에 엎드려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신이 양공과 힘을 합해 반도들을 물리쳐 무황가를 일으켜 세우겠소이다."
유협은 동승의 손을 잡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ㆍㆍㆍ 내 이젠 그대들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구려."
일행은 다시 대오를 가다듬어 홍농을 향해 출발했다. 홍농에 도착해봐야 별 뾰족한 수가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나 지긋지긋한 도망자의 신세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재촉하며 달렸다.
초록은 동색(同色)이라고 했다. 이각과 곽사는 같은 부류에 속한 자들이라 반목할 땐 반목해도 상호간에 이익이 맞아떨어지면 손을 잡는 족속이었다. 곽사는 동승에게 패해 달아나던 중 이각을 만나게 되었다. 이각이 안색이 변해 싸우려는데 곽사가 꼬리를 내리며 말을 걸었다.
"양봉과 동승이 유협을 데리고 홍농으로 가버렸소. 놈들이 그 곳에서 자리 잡게 되면 첩지를 돌려 호웅들을 모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우리 두 사람은 어찌 되겠소? 천하의 공적이 되어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이오."
이각이 들으니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는 교활하게 눈을 굴리다가 제안했다.
"옳은 말이오. 마침 장제가 장안에 떨어져 있으나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차제에 우리가 손을 잡고 홍농으로 가 유협을 죽여 버린 후 무림을 반반씩 나누어 가지는 게 어떻겠소?"
곽사는 크게 기뻐했다.
"그게 바로 내 생각이오!"
두 흉적은 의기투합하여 홍농을 향해 달려갔다. 홍농에 도착한 그들은 인근의 군소방파(群小幇派)를 가차 없이 짓밟아버렸다. 혹여나 무황에 동조할까 염려한 조치였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무림인들의 목을 잔인하게 베어버리고 아녀자들은 강간한 후 살해해버렸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며 흘러내렸다.
동승과 양봉 일행은 얼마 못 가서 두 흉적에게 추격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이각과 곽사가 연합하였으므로 당해낼 수가 없었다. 무사들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무황의 가신들과 식솔들 중에서도 죽는 자, 실종되는 자가 속출해갔다.
동승과 양봉은 간신히 유협과 무황후를 모신 채 섬북(陝北) 방향으로 달아나는 한편 은밀히 사신을 하동(河東)으로 보냈다.
하동에는 오래 전부터 한섬(韓暹), 이낙(李樂), 호재(胡才)란 인물이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과거 흑도(黑道)에 속한 도적무리들이었으나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스스로 호웅을 자처하고 있었다. 지난날의 동승과 양봉이라면 그들을 상대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사정이 화급하여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승은 유협을 설득해 그들로 하여금 무황을 보위해 달라는 첩지를 내린 것이었다. 3인 중에서도 이낙이 가장 세력이 컸다. 이낙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도적의 오명을 벗고 무림의 호웅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동승, 양봉과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먼저 홍농을 탈환했다. 그가 손쉽게 홍농을 탈환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각, 곽사가 낙양과 홍농 일대의 군소방파들를 유린하느라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각, 곽사는 낙양과 홍농 일대의 군소방파들을 유린하며 계획을 바꿔 무인들을 선별하여 수하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장차 천하무림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큰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젊고 무예에 능한 자들을 선별하여 금은을 후하게 내주고 주색(酒色)을 마음껏 취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렇게 끌어 모은 무리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죽음을 불사한 채 그들의 명을 따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각, 곽사의 힘은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얼마 후 이낙은 위양(渭陽)에서 그들과 부딪치게 되었다. 곽사는 이낙의 무리들이 도적 출신이라는 점을 알고 한 가지 꾀를 썼다. 그는 수하들을 시켜 금은보화를 길바닥에 뿌려 둔 후 매복했다.
이낙의 무리가 눈이 뒤집힌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앞을 다투어 길바닥에서 재물을 줍는 바람에 삽시간에 대오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곽사의 수하들이 기습했다. 누구라도 공을 세우기만 하면 재물과 미녀들을 차지할 수 있기에 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결국 이낙은 곽사에게 패해 달아나다 한섬, 호재와 함께 무황 일행과 합류하고 말았다.
무황 일행은 이각, 곽사에게 쫓기며 북쪽으로 달아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추격자들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함성소리가 다가오자 다급해진 이낙이 제안했다.
"폐하께 말해 말을 타고 먼저 가게 합시다."
유협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어찌 나 혼자 살겠다고 먼저 갈 수 있단 말이오?"
하지만 추격자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얼마 못가 잡힐 것 같았다. 결국 유협은 이각의 제안을 받아들여 마차를 버리고 말로 갈아탈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미를 맡고 있던 호재가 추격자들과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일행의 사기는 더욱 더 떨어지고 말았다.
얼마 후 그들 앞에 탁류(濁流)가 나타났다. 도도히 흐르는 거대한 탁류는 중원을 남북으로 가르며 흘러내리는 황하(黃河)였다. 앞은 대하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이각, 곽사의 무리가 쫓아오고 있었다.
"아아! 정녕 하늘이 날 버린단 말인가?"
낙심한 유협이 황하를 바라보며 한탄하고 있는데 이낙의 수하들이 어디선가 작은 배 한 척을 구해왔다. 그런데 둑에서 배가 있는 수면까지는 경사가 심하게 져있어 말을 타고 내려가기가 불가능했다.
이 때 누군가 비단을 구해와 유협과 무황후를 둘둘 감은 다음 둑에서 아래로 내려놓았다. 유협은 자신의 한 몸조차 스스로 운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피눈물을 흘렸다. 그가 아무리 허약하다해도 대대로 전해 오는 무황가의 무예를 익힌 몸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는 내공(內功)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의 음식에 서서히 작용하는 산공독(霰功毒)을 풀었기 때문이었다. 산공독을 푼 자들이 십상시였는지 동탁이었는지, 아니면 이각과 곽사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 때부터 그는 무예를 연마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