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각은 양봉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수하들도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감소되어 있어 기도 꺾인 상태였다.
그 때 마침 한 가지 소식이 날아들었다.
"섬서(陝西)에서 장제(張濟)가 무사들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수하의 보고에 이각은 안색이 변했다.
"그 자가 무슨 이유로 이 곳에 온단 말이냐?"
"두 분 대공의 싸움으로 무림이 동요하고 있으니 화해시키겠다고 합니다. 만일 듣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합니다."
본래 장제는 이각, 곽사, 번조와 함께 여포를 물리치고 무황성을 장악한 위인이었다. 그 후 번조는 이각에게 제거되었고 장제 역시 그에게 굴복한 바 있었다. 장제는 이각과 곽사에 비해 세력이 약했으므로 무황성을 떠나 섬서로 돌아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얼마 전이었다면 장제쯤이야 두려워 할리 없는 이각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장제의 권고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화해에 응하겠노라고 전하자 곽사 또한 어쩔 수 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장제는 유협을 알현한 후 자신의 의견을 여쭈었다.
"신이 보니 장안은 폐허가 되어 더 이상 거할 곳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차제에 무황성을 홍농(弘農)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홍농은 무황성이 있던 낙양 인근이었다. 유협은 눈시울을 붉혔다. 낙양이라면 지난날의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 아니던가? 동탁이 강제로 무황성을 장안으로 옮기기 전까지만 해도 역대 무황이 무림을 다스리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아아! 내 얼마나 그 곳을 그리워했는지 모르겠소. 이제야 돌아가게 되었으니 내 마음 한량없이 기쁘오."
그는 장제에게 작위를 내리고 홍농으로 떠날 채비를 차렸다. 장제는 그 동안 굶주림에 시달렸던 시종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어주고 이각과 곽사를 독촉했다. 곽가는 내키지 않았지만 가신들을 모두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이각은 심복 양위에게 명을 내려 마차에 유협과 무황후를 태우고 홍농이 있는 낙양을 향해 떠나도록 했다.
때마침 가을이었다. 연도는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물들어 그 풍치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유협과 무황후는 마차 안에서 풍광을 감상하며 옛 무황성으로 돌아간다는 감회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일행이 신풍(新豊)을 지나 패릉(覇陵)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고함소리와 함께 다리를 막아서는 수백 명의 무사들이 있었다.
"거기 오는 자는 누구냐!"
누군가의 외침에 마차를 호송하던 양기가 말을 몰아 다리 위로 나가며 호통쳤다.
"무황께서 행차하시는데 누가 감히 길을 막는 거냐?"
두 명의 장한이 앞으로 나오더니 말했다.
"우리는 곽대공의 명을 받들어 도적들을 경계하고 있었소이다. 과연 무황폐하인지 아닌지 눈으로 확인해야겠소."
양기는 직접 마차의 주렴을 걷어 올려 주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유협은 밖을 내다보며 꾸짖었다.
"날 보고도 그대들은 어찌 길을 열지 않느냐!"
두 장한은 흠칫하더니 손을 저어 수하들을 물러나게 하였다. 양기는 무사히 마차를 호송하여 다리를 통과할 수 있었다.
두 장한은 곽사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런데 뜻밖에 곽사는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내 장제를 속여 일시 물러서긴 했다만 무황을 잡아가려 했는데 네놈들이 어찌 놓아줬단 말이냐!"
두 장한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곽사는 두 장한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실상 그는 이각과 화해하긴 했으나 본심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각이 양기를 시켜 무황을 낙양으로 호송하는 바람에 마음이 급해졌다. 이각이 무황을 손아귀에 쥐고 전열을 재정비하게 되면 불리해 질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는 곧바로 무황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무황 유협을 실은 마차가 화음(華陰)에 이르렀을 때였다.
뒤쪽으로부터 말발굽소리가 울리더니 누군가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를 멈추어라!"
유협은 곽사가 쫓아온 것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아! 겨우 이리의 소굴을 벗어난 줄 알았는데 또다시 범의 아가리에 들게 되었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마차를 따르던 가신들도 사색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말발굽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그런데 갑자기 산 위로부터 북소리가 울리며 일단의 무사들이 달려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유협은 선두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자를 보고 부르짖었다.
"오오! 저 자는 양봉이 아닌가?"
산에서 달려 내려온 무리는 양봉과 그의 수하들이었다. 양봉은 이각에게 패해 종남산(終南山)에서 숨어 지내던 중 무황 일행이 지난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양측은 마차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유협을 추격해 온 자는 곽사의 수하 최용(崔勇)이었다. 최용은 양봉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욕을 했다.
"네놈은 무환공을 배신한 역도가 아니냐?"
양봉은 대로하며 소리쳤다.
"누가 저 놈의 목을 베어다 바치겠느냐!"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장한이 거부(巨斧:도끼)를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최용도 지지 않고 창을 꼬나 쥐고 마주쳐 나갔다. 두 필의 말이 어울렸다 싶은 순간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놀랍게도 단 일합 만에 장한의 도끼를 맞고 최용이 말 아래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와아아!"
양봉의 무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곽사의 무리를 향해 쳐들어갔다. 곽사의 수하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양봉은 수하들과 함께 마차로 다가갔다.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이각의 무리는 겁을 먹고 모두 달아나 버린 뒤였다. 양봉이 마차 앞에 이르러 절을 하자 유협이 내려와 손을 잡고 말했다.
"아아, 그대가 날 구해주었구려."
"황공합니다. 폐하."
유협은 고개 돌려 장한을 바라보았다.
"뭘 하고 있나? 폐하께 뵙지 않고?"
최용의 말에 장한은 부복하며 굵은 음성으로 말했다.
"불초 하동 출신의 무부로 서황(西晃)이라 합니다."
유협은 서황의 떡 벌어진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대의 눈부신 무예에 찬탄을 금치 못하였소. 앞으로도 날 보위해 주기 바라오."
서황은 유협의 찬사에 감격해 어쩔 줄을 모르며 그저 예! 예!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