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후가 돌아간 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이각이 들어왔다. 그는 옆구리에 칼을 차고 들어와 큰소리를 쳤다.
"곽사란 놈이 반심을 품고 가신들을 가두었소이다! 그 놈을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소이다!"
유협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무리 힘없는 무황이라고 해도 내전까지 칼을 차고 들어설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감히 이각을 꾸짖을 용기가 나지 않아 더듬거리며 반문할 뿐이었다.
"그, 그런 일이 있었소?"
이각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만일 내가 폐하를 호송해 오지 않았으면 놈에 의해 무황의 대가 끊길 뻔 했소이다!"
"고ㆍㆍㆍ 고맙구려. 그대야말로 무황성의 수호신이외다."
유협은 고개를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각은 칼자루를 움켜쥔 채 내전을 오락가락하다가 사라져버렸다. 그의 그런 행동은 유협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이각이 사라진지 얼마 안 되어 이번에는 황보력이 찾아와 알현했다. 그는 이각과 달리 유협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그를 보자 유협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황보력은 본래 언변이 좋은 것으로 유명할 인물로 이각과는 동향인이기도 했다.
"내 그대에게 부탁을 하나 할까 하오."
황보력은 고개를 조아렸다.
"하명 하옵소서."
"아아! 대원공이나 대환공 모두가 무림을 떠받드는 기둥이 아니오? 그런데 사소한 오해로 인해 이렇게 원수를 지고 싸우니 무림의 장래가 걱정이오. 그대가 나서서 두 분을 화해시켜 줄 수 없겠소?"
유협은 본래 양표의 반간계를 받아들여 두 사람을 이간토록 했다. 그로인해 두 사람은 두 달째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무황의 자리를 되찾겠다는 것이었지만 상황이 악화되어 도리어 화를 입게 될 판국이었다. 그래서 다시 화해를 청하게 된 것이었다.
황보력은 그 길로 곽사를 찾아가 간곡하게 화해를 청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절하던 곽사는 마지못해 말했다.
"이각이 먼저 무황을 내놓는다면 나도 가신들을 풀어주겠네."
황보력은 다시 이각을 찾아갔다.
"폐하께서 특별히 신으로 하여금 화해를 도모하도록 당부하셨소이다. 곽대공께서도 이미 수락하셨으니 공도 이만 화를 푸시는 것이 어떻소이까?"
이각은 눈을 부라리며 노성을 발했다.
"내가 여포를 쳐서 무황성을 구해냈으니 일등공신이 아니오? 그런데 이제 와서 곽사란 놈이 가신들을 가두어 놓고 날 핍박하니 어찌 두고 본단 말인가? 내 맹세코 놈을 죽여 기강을 바로잡고 말 것이오! 두고 보시오! 내 방책으로 보나 힘으로 보나 놈을 못 이길 것 같소?"
황보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이다. 하(夏) 나라 때 유궁국(有窮國)의 후예가 자신의 궁술과 힘만 믿다가 신하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소이까? 또한 가까이로는 동무성의 위세는 또 얼마나 대단했소이까? 하지만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혀 여포의 손에 비참하게 죽지 않았소? 아무리 강하다 해도 후일을 장담할 수 없는 법이오. 게다가 공은 이미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늘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이오? 그 모두가 폐하의 은덕인데 이제 와서 곽대공은 가신들을 핍박하고 공은 폐하를 핍박하고 있으니 너무하지 않소?"
황보력은 처음에는 차분하게 설득하다가 결국은 준엄하게 꾸짖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각은 발연대로하여 칼을 뽑으며 외쳤다.
"이 놈이 무황의 지시를 받고 날 욕보이러 왔구나! 좋다! 과연 목이 떨어져도 그런 말을 하는지 두고 봐야겠다!"
이각이 칼을 휘두르려는데 양봉(楊奉)이 달려와 만류했다.
"곽사를 제거하지 못한 터에 무황의 사신을 죽이면 놈에게 구실만 내줄 뿐입니다. 더불어 호웅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참으셔야 합니다."
소식을 듣고 가후도 한 달음에 달려와 간곡하게 만류했다. 이각은 억지로 분노를 누른 후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저 놈을 내 쫓아라!"
황보력은 밖으로 쫓겨 난 후에도 음성을 높여 부르짖었다.
"저 놈이 끝내 폐하를 죽이고 무황의 위를 찬탈할 놈이로다!"
그 말에 가신 중의 한 명인 호막(胡邈)이 다가와 충고했다.
"입을 다무시오. 화를 당할까 두렵소이다."
황보력은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 놈아! 오랫동안 무황성의 녹을 먹은 놈이 어찌하여 도적놈에게 아부한단 말이냐? 옛말에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는 법(君辱臣死)이라 했다! 내 이각의 손에 죽는다면 명분에 맞는 일일 뿐이다!"
호막은 안색이 흙빛이 되었으나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황보력은 이각의 진중을 돌아다니며 음성을 높여 외쳤다.
"모두들 들어라! 이각이 모반을 꾸미고 있으니 그를 따르는 자는 무림의 역도가 될 것이다! 역도가 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본래 이각의 무리는 대부분 황보력과 같은 동향 출신이라 그의 말에 솔깃하게 되었다. 또한 긴 싸움으로 지칠 대로 지친데다 이각이 무녀에게 빠져 수하들의 공을 돌보지 않는 바람에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각은 막사에서 그 소식을 듣고 대로하여 수하 왕창(王昌)을 보내 황보력을 잡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왕창 또한 내심으로 황보력의 뜻을 공감하고 있었다. 그는 황보력이 달아나도록 충분히 시간을 끌다가 돌아가 보고했다.
"놈이 벌써 달아나 버렸습니다."
일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무사들의 마음은 미리 그를 이반(離反)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후가 은밀히 돌아다니며 무사들을 충동질했다.
"폐하께서는 그대들의 충심을 알고 있다. 또한 무림을 위해 오랫동안 고생한 것을 헤아려 이번에 고향에 돌아가 쉬도록 특별히 밀지를 내리셨다. 뿐만 아니라 후일 큰 상을 내리겠노라 말씀하셨다."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무사들에게 그 말은 기폭제가 되고 말았다. 비록 가후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 해도 더 이상 명분 없는 싸움으로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았다. 급기야 무사들은 하나 둘 진영을 이탈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가후는 유협을 만나 계책을 일러 주었다.
"이각은 탐욕은 많으나 지혜가 없는 자입니다. 게다가 무사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불안해하고 있을 겁니다. 이 참에 그에게 작위를 내려 달래주면 좋아할 것입니다."
유협은 그의 말에 따라 이각에게 태무공(太武公)이란 작위를 하사했다. 이각은 작위를 받고 크게 기뻐했다.
'이 모두가 무녀들이 기원한 덕이로구나!'
그는 무당과 무녀들을 불러 후하게 금은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수하들에게는 아무런 상도 내리지 않았다. 그 소식에 무인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그들 중 양봉은 분함을 참지 못해 하고 송과(宋果)를 만나 불만을 털어 놓았다.
"우리가 그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워왔거늘 그 무당 년들보다 못하단 말인가?"
송과 역시 흥분을 금치 못했다.
"맞는 말이네! 이젠 더 이상 참지 못하겠네! 그 도적놈을 쳐 죽이고 무황폐하를 구하세!"
"그럼 자네는 진중에서 불을 질러 신호하게. 난 밖에서 무사들을 모아 호응하겠네."
그런데 뜻밖에도 이각이 정보를 입수해 버렸다. 이각은 송과를 잡아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렸다. 한편 그 사실을 모르는 양봉은 눈이 빠지도록 불길이 오르기를 기다렸으나 도무지 신호는 오지 않았다. 대신 이각이 무리를 이끌고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놈! 네가 날 배신하다니! 내 네놈의 목을 베어 매달고 말겠다!"
양봉은 크게 놀랐지만 활은 이미 시위를 떠난 셈이라 이각과 맞붙어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이각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무사들과 함께 서안(西安) 방향으로 달아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