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소, 오늘은 이만 하도록 하겠소."
이각이 먼저 말머리를 돌리더니 수하들과 함께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실상 두 사람이 권고를 받아들인 것은 가신들의 뜻을 받아 들였다기보다는 격전으로 인해 지쳤기 때문이었다. 양표는 한숨을 쉬며 곽사에게 사의를 표했다.
"고맙소이다. 신들의 뜻을 따라주어서ㆍㆍㆍㆍㆍㆍ."
양표의 표정이 굳어졌다. 갑자기 곽사의 수하들이 가신들을 빙 둘러싼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설마ㆍㆍㆍㆍㆍㆍ."
곽사는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
"저 놈들을 모두 잡아 가두어라!"
양표는 놀라 항변했다.
"우리는 두 분을 화해시키려 했을 뿐인데 어찌하여 핍박하는 것이오?"
"흥! 이각이란 놈은 무황을 잡아놓고 있지 않느냐? 내가 가신들 쯤 가둔다고 무슨 대수란 말이냐?"
양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아아! 하나는 무황을 핍박하고 하나는 가신들을 핍박하니 하늘도 무심하구나!"
곽사는 대로하여 칼을 뽑아 양표의 목을 치려했다. 그러자 심복 양밀(楊密)이 나서 만류했다.
"고정하십시오. 저 자의 목을 치는 건 쉬우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곽사가 가만히 생각하니 옳은 말이었다. 양표와 주준은 명망 있는 자들로 그가 직접 죽인다면 인심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칼을 거두며 명을 내렸다.
"양표와 주준을 돌려보내되 남은 자들은 모두 감금해라!"
죽음 직전에 풀려나게 된 양표는 바닥에 쓰러지며 울부짖었다.
"내 선대 무황으로부터 헤아릴 길 없는 은덕을 입었으나 오늘 날 도적놈으로부터 무황성을 지킬 수 없으니 살아서 무엇에 쓴단 말인가!"
주준도 그를 부둥켜안고 통곡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한참을 울다가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얼마 후 의식이 돌아온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으나 그 날로 주준은 자리에 눕더니 그만 숨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이각의 진영에서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각은 무당들을 신봉하여 집에서도 사당(祠堂)을 꾸미고 수시로 굿을 하곤 했다. 특히 얼마 전부터는 사술(邪術)에 능한 요녀(妖女)를 측근에 두고 모든 일을 상의하곤 했다.
막사 안에서 향연(香煙)이 자욱하게 깔리고 있었다.
"그래, 이번 싸움은 어떻게 되겠느냐?"
막사 안에서는 울긋불긋한 제의(祭衣)를 입은 무녀(巫女)가 한 손에는 방울을, 한 손에는 팔괘패를 쥐고 흔들어 대고 있었다.
"호호ㆍㆍㆍ 염려 놓으세요. 곽사란 자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나리의 승리가 분명하옵니다."
"오오ㆍㆍㆍ 그래?"
이각의 표정이 환해졌다. 무녀는 몸을 일으켜 이각의 주변을 맴돌며 주문을 외웠다. 그녀의 손에서 향낭이 흔들리며 묘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향기를 맡은 이각의 피가 점차 뜨거워졌다.
"조상의 음덕과 천지신명의 점지를 받아ㆍㆍㆍ 북두(北斗)의 기운이 모이니ㆍㆍㆍ 장차 제왕의 자(子)를 얻게 되리라!"
이각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무녀가 춤을 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무녀는 제의를 하나씩 벗어던지고 있었다. 무녀가 흔드는 향낭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정체불명의 향기는 일종의 몽혼향(夢魂香)이었으나 그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켜 무녀를 향해 다가갔다.
무녀는 어느새 전라가 되어 그의 목에 매달리며 옷을 벗기고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알몸이 되어 뒹굴기 시작했다. 막사 안에 자욱하게 퍼진 몽혼향! 그 속에서 뒤엉킨 이각과 무녀는 방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아ㆍㆍㆍㆍㆍㆍ."
무녀는 방중술(房中術)을 구사하며 이각을 황홀경으로 인도했고 이각은 정혈(精血)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점점 더 무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이각은 사술을 익힌 무녀를 알게 되면서부터 판단력이 흐려졌을 뿐더러 모사들의 말도 듣지 않았다. 오직 무녀를 통해 점을 치고 그 결과만을 믿었다.
"ㆍㆍㆍㆍㆍㆍ."
가후는 막사 밖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의 귀로 흘러드는 것은 이각과 무녀의 신음소리였다. 그는 수십 차례에 걸쳐 이각에게 무녀를 멀리하라고 간했지만 번번이 욕만 얻어먹고 쫓겨났었다.
그가 이 밤중에 이각을 찾아온 것은 상황이 심각하기 때문이었다. 벌써 두 달여를 끌어온 곽사와의 싸움으로 수많은 무사들이 죽거나 다쳐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각은 무녀에게 빠져 수하들을 챙기는 일을 외면하다시피하고 있었다. 공을 세운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는커녕 무당들에게 엄청난 금은보화를 뿌리고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무사들의 마음이 이각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후는 마지막으로 이각을 찾아왔지만 막사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아아! 하늘이 대원공을 버리신단 말인가!'
그는 탄식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그 때였다
"가공께 드릴 긴히 말씀이 있소이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타나며 말했다. 돌아보니 무황성의 가신 양기(楊琦)였다.
"무슨 일이오?"
양기는 주위를 둘러본 후 그의 귓전에 대고 말했다.
"폐하께서 은밀히 청하시오."
가후는 흠칫했다.
"폐하께서?"
유협은 가후의 손을 잡고 처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가 이 못난 사람을 위경에서 구해주겠는가?"
가후는 유협을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 임에도 온갖 고난과 풍상을 겪은 탓인지 유협의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해져 있었다. 그는 가슴이 찌르르했다.
"신 폐하를 위해서 무슨 일인들 못하겠사옵니까? 하명만 하여 주십시오."
유협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해졌다.
"오오! 선황의 음덕이 있어 그대 같은 충신이 남아 있음이오. 내 그대만을 믿겠소이다."
가후는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말했다.
"신 적당한 기회를 보아 도모하도록 하겠습니다."
유협이 가후를 청한 것은 그가 이각의 모사이면서도 무황에 대한 충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양기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기로 하여금 그를 청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