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포가 서주로 오고 있다합니다."
그것은 미축의 음성이었다. 유비의 몸이 멈칫했다. 하지만 다시 강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미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교성을 발했다. 잠시 후 그녀의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히는가 싶더니 전신을 파르르 떨다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와 함께 유비의 몸도 경직되고 있었다. 유비는 눈을 감고 여운을 즐기는 듯 가만히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미부인의 다리를 놓아주고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밖으로 나가자 저만치 등을 돌리고 서있는 미축의 모습이 보였다. 유비는 그의 손을 잡고 걸었다.
"공의 생각은 어떻소?"
미축은 그의 신하다. 그러나 그의 누이가 부인이 되었으니 처남 매형 사이이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유비는 그를 미공이라 칭했다.
"주공께 의탁하러 오는 것입니다. 그를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이리와도 같은 작자니 은혜를 알기보다는 주인을 물어뜯을 자입니다."
미축의 미간에는 근심이 어려 있었다. 유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여포는 당대의 영웅인데 내 어찌 가만히 앉아 맞이할 수 있겠소. 마중 나가는 것이 도리일 것이오."
미축은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주공?"
"전자에 그가 연주를 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찌 서주를 지킬 수 있었겠소? 이제 그가 어려워져 찾아오는데 외면할 수야 없지 않소."
그 때 버럭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형님은 어찌 그리도 인심이 좋소? 그 놈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어찌 안단 말이오?"
언제 나타났는지 장비가 얼굴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유비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주인이 손을 두려워하면 집안 일이 안되는 법이라네."
유비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장비와 미축, 심지어는 관우까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500여 명의 무사들을 대동하고 30리 밖으로 나가 여포를 맞이했다.
여포는 뜻밖의 환대를 받으며 서주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는 유비의 부중에서 좌정하자마자 음성을 가다듬어 말했다.
"나는 왕사도를 도와 천하의 악적인 동탁을 죽였소이다. 그러다 이각과 곽사의 환란을 만나 무림을 떠도는 몸이 되었소. 그런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날 용납해 주지 않았소이다. 그러던 차 조조가 서주를 범한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마침 유공이 의로운 기개를 일으켜 서주를 돕는다는 말도 들었소이다. 하여 내 딴에는 서주를 보호하기 위해 조조의 허를 찔러 연주를 친 것이오. 한데 그만, 놈의 간계에 걸려 수하들을 잃고 이렇게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소이다. 내 공을 찾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공의 인품과 덕을 믿고 몸을 의탁하여 함께 무림대사를 논하고자 함이었소이다."
여포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이런 긴 말을 한 것이었다. 물론 사전에 진궁으로부터 들어 수없이 연습을 한 결과이기도 했다.
유비는 가느다란 눈을 껌벅이며 그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었다. 여포는 잠시 뜸을 들였지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하면 공의 생각은 어떻소이까?"
이 때 장비는 여포의 뒤에 서있었다. 그는 유비를 향해 눈을 끔뻑거렸다. 뿐만 아니라 손도 휘휘 젓고 있었다. 물론 거절하라는 뜻이었다.
마침내 유비의 입술이 열렸다.
"그야 이를 말씀입니까? 불초가 서주를 맡은 것은 도대공께서 불시에 병사하였으므로 임시로 맡은 것뿐입니다. 다행히 여공께서 오셨으니 바라 건데 공께서 서주를 다스려주셨으면 합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선언이었다. 장비는 물론 유비의 뒤에 장승처럼 서있던 관우의 눈도 부릅떠졌다. 미축 역시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얘지고 있었다.
여포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에 입이 쩍 벌어졌다. 그는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며 유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때였다.
쿵! 하는 소리가 그의 뒤에서 울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장비가 장팔사모로 바닥을 내려찧고 있었다. 장비는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노려보며 여차하면 장팔사모로 머리통을 부숴버릴 듯한 기세였다.
여포는 다시 목을 움츠렸다. 이번에는 맞은편에 서있는 긴 수염에 위풍당당한 체격을 지닌 관우와 눈길이 딱 마주친 것이다. 관우는 80근이 넘는 청룡언월도를 번쩍 어깨 위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러다 목이 떨어지겠구나!'
그는 유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일개 무부가 어찌 서주를 맡을 능력이 있겠소? 가당치 않은 말씀이오."
기다렸다는 듯 여포의 옆에 서있던 진궁이 말했다.
"예로부터 객(客)이 주인을 억압하는 법은 없다고 했사옵니다. 비록 주공께서 일시적으로 곤궁하긴 하오나 서주를 넘보진 않을 것입니다. 유대공께서는 심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유비는 눈길을 돌려 진궁을 바라보았다. 진궁은 공손히 포권하고 있었다. 실상 진궁은 유비가 본심에서 우러나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부러 여포의 마음을 떠보기 위함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유비도 더 이상 권하지 않고 허허! 웃었다.
"강호의 대영웅께서 왕림하셨는데 대접을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쪼록 언제까지고 편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유비는 연회를 열어 여포와 그의 무사들을 접대했다. 평소 검박하기로 소문난 그였으나 이번만큼은 아낌없이 물량을 투입하여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끝난 후에는 넓고 큰 집을 정해여포 일행을 편히 묵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다음 날 여포는 보답하는 뜻으로 유비를 초대했다. 유비는 관우, 장비와 더불어 그의 초대에 응했다. 그들은 함께 술을 마시며 화기애애하게 환담을 나누었다. 저녁이 되자 여포는 술이 얼큰하게 올라 유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후당에 가서 더 마십시다. 이젠 한 집안이나 다름없지 않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