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여포는 보로 돌아가자마자 진궁에게 자신이 본 상황을 들려주었다. 진궁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조는 교활한 작자니 경솔히 움직이면 안 됩니다."
여포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놈의 계책이 뻔한데 망설일 게 뭔가? 화공(火攻)으로 숲을 태워버리면 매복했던 놈들은 절반은 타 죽어버릴 걸세. 정 걱정되면 자네가 고순과 함께 이 곳을 지키고 있게. 이번에야말로 조조란 놈의 수급을 들고 돌아오겠네."
여포는 새벽녘에 기름통과 솜방망이를 준비한 후 보를 나섰다. 숲 가까이에 이르러서 살펴보니 숲의 여기저기에서 조조의 깃발이 숨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어.'
그의 지시에 따라 수하들은 숲의 사방에 불을 질렀다. 잠시 후 숲은 온통 불천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불길 속에서는 비명소리가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때였다. 숲에서 떨어져 있는 조조의 진영으로부터 북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즉각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공격해라!"
여포는 곧바로 조조의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바로 그 때 후미로부터 지축을 울리는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빗발치듯 무수한 화살과 암기가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여포의 수하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여포는 비로소 진궁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만시지탄(晩時之歎)이었다.
조조의 수하들은 둔덕 뒤에 숨어있다 신호에 따라 일제히 공격했던 것이다. 불시에 공격을 받은 여포의 수하들은 우왕좌왕하다 무더기로 쓰러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울리는 북소리와 우박처럼 날아오는 화살과 암기! 그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길을 찾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시체만 산더미처럼 쌓여갈 뿐이었다.
여포는 적토마를 타고 이리 치고 저리 달리며 천극도를 휘둘러댔지만 고작 수십 명의 졸개들을 벨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서 그의 수하들은 삼분지 일이 이상이 죽고 말았다.
한편 진궁은 혈로를 뚫고 돌아온 무사로부터 비보를 전해 듣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아! 내 말을 듣지 않더니 결국은 함정에 빠지고 말았구나!"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깨져버린 그릇이었다. 그는 냉정히 앞일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정도는 텅 빈 것이나 다름없으니 후일을 도모할 수밖에.'
그는 고순과 함께 여포의 식솔들을 데리고 정도를 빠져나갔다. 그의 판단은 백번 옳았다. 조조의 무리가 예상보다 빨리 쳐들어와 파죽지세로 정도를 쓸어버린 것이다.
마지막까지 정도를 지키던 장초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장막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정도를 빠져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결국 그는 원술에게 몸을 의탁하기로 하고 살아남은 수하들과 함께 떠나버렸다.
조조는 자신의 영지를 모두 되찾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성세는 더욱 커져 명실상부한 동(東)무림의 패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군사들이 모이자 그는 칼칼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서주에 있는 귀 큰 놈을 치자고 해도 만류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네만, 어떤가?"
순욱과 정욱, 모개가 앞을 다투어 말했다.
"무사들이 지쳤습니다."
"그렇습니다. 휴식을 취하며 영지를 견고히 해야 할 때입니다."
"서주는 언제든지 칠 수 있습니다. 이 곳은 원소와 원술과 인접한 곳으로 그들이 넘보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충분히 힘을 축적하여 동무림의 패주에 걸 맞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조조의 목에 심줄이 불거져 나왔다. 그는 돌아서더니 서쪽 하늘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군사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한참 만에 조조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허! 진작에 놈을 제거했어야 하는데ㆍㆍㆍ 아니면 놈을 내 밑에 두던가. 놈의 명이 정말 질기군. 세 번씩이나 죽음을 비껴가니 말이다!"
여포의 비참한 심정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평소 같잖게만 보았던 조조에게 패배했을 뿐더러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무인(武人)으로서는 천하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였으나 세상일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ㆍㆍㆍㆍㆍㆍ."
그는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패잔병이 되어 달아나다 닿은 곳이 바닷가였다. 망망한 대해(大海)를 바라보자니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보름이 지나자 사방으로 흩어졌던 수하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장패, 후성 등이 합류했고 진궁도 고순과 함께 식솔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이 모이자 여포는 다시 기운이 솟아났다.
"이 여포, 아직은 죽지 않았다. 조조 따위는 지금이라도 쳐 죽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조에게 패한 것은 수하들의 힘을 모으지 못한 탓이지 자신이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일 일대일로 싸운다면 천하의 그 누가 자신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대오를 정비하면서 점점 투지가 끓어올랐다. 진궁은 어느 날 그에게 물었다.
"이 진궁을 믿지 못하겠소이까?"
"그게 무슨 말인가?"
"불초는 지금까지 여대공을 위해서라면 진력을 다해왔소이다. 하온데 어찌하여 불초를 믿지 않으시는 것이오?"
여포는 가슴이 뜨끔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진궁은 여러 번 그에게 간언을 하고 계책을 일러주었다. 따지고 보면 진궁은 그의 수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 때마다 목숨을 걸고 초선을 비롯여 식솔들을 구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면 최소한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포는 한동안 진궁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잘못했다. 앞으론 그대를 하는 말을 듣도록 하겠다."
진궁의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여포가 누군가? 그는 한때 동탁의 오른팔로 무림의 공적이 된 적이 있었으나 동탁을 제거한 영웅이기도 했다. 또한 천하제일고수로서 그의 앞에서 겁먹지 않는 자 없었다. 그런 그가 고개를 숙인 것이다.
진궁은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꿇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진궁ㆍㆍㆍ 앞으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주공을 위해 살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겠소이다!"
여포의 가슴에서도 울림이 일어났다. 그는 진궁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내 비록 어리석은 일개 무부(武夫)에 지나지 않으나 그대가 따라 준다면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네."
"주공ㆍㆍㆍㆍㆍㆍ."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