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호유삼국지가 실수로 잘못 실렸습니다. 오늘은 2회분입니다. 해량하여 주시와여.
유비는 아우들이 돌아간 후 산책을 하기위해 처소를 나섰다. 어둠에 잠긴 보는 조용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걸으며 생각에 잠겨들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홀연히 귓전에 흘러드는 비파소리가 있었다.
"ㆍㆍㆍㆍㆍㆍ."
유비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비파음은 밤공기를 타고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비파음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매끄럽고도 여유 있게 흐르는 비파음에는 생의 아름다움과 환희가 감미롭게 실려 있는 듯했다. 유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누가 이런 음을 탄주한단 말인가?"
살벌한 전장에서 쌍고검을 휘두르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그에게 비파음은 아늑한 평화로움을 느끼게 했다. 얼마 후 그는 한 저택의 월동문을 넘어섰다.
저택은 규모가 클뿐더러 무척이나 호사스러워 도겸으로부터 물려받은 부중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더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문득 그의 코끝에 진한 화향(花香)이 풍겨왔다.
"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가 온통 꽃 천지다. 조화롭게 가꾸어진 화원은 지상의 모든 꽃들을 모아 놓은 듯 이름도 모를 기화요초(琪花瑤草)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뽐내고 있었다.
홀연히 비파의 음률이 바뀌었다. 생의 환희가 끝난 뒤에는 반드시 슬픔과 허무가 따른다는 듯, 이번에는 인생의 고독과 슬픔, 고통과 절망의 느낌이 절절이 실리고 있었다. 유비는 음을 좇아 화원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한 채의 정자가 화원 한가운데 있었다. 비파음은 그 정자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유비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그 순간 비파음이 멈췄다.
"뉘 시온지요?"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영롱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유비는 흠칫 놀라 정자를 향해 포권했다.
"이거 실례 많았소이다. 비파음에 끌려 나도 모르게 그만ㆍㆍㆍㆍㆍㆍ."
정자에서 비파를 탄주하던 여인이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남색 교의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은 20세가 채 안되어 보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난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인은 무릎 위에 비파를 올려놓은 채 유비를 바라보며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유비는 헛기침을 한 후 정중하게 사과했다.
"본의는 아니었소만 소저의 탄주가 하도 좋아 무례를 범했소이다. 그럼ㆍㆍㆍㆍㆍㆍ."
그는 다시 한 번 포권한 후 돌아섰다. 그 때였다.
"혹ㆍㆍㆍ 현덕 유대공이 아니신지요?"
홀연히 들려온 여인의 고운 음성에 유비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돌아서며 반문했다.
"소생을 어찌 아시오?"
여인은 비파를 한쪽에 밀어놓고 몸을 일으키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대해(大海)와도 같은 넓은 이마와 측량할 길 없는 혜안(慧眼), 어깨까지 내려오는 귀ㆍㆍㆍ 이렇듯 특이한 상(相)을 지닌 분이 세상에서 또 있다면 이상한 일이지요. 소녀는 미씨((靡氏) 성을 가진 처자이옵니다."
여인은 한 쪽 무릎을 꿇으며 날아갈 듯이 절을 했다. 유비는 멍하니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음성도 음성이려니와 규범 있는 태도와 단아한 자태는 그의 넋을 앗아가기에 족했다.
"미거한 소생을 알아보시다니 영광이오ㆍㆍㆍㆍㆍㆍ."
유비는 정자 위로 올라갔다. 정자 위에서 보니 달빛을 받은 화원이 마치 꽃의 물결을 보는 듯 황홀했다. 여인은 섬섬옥수로 입가를 가리며 수줍은 듯 말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답다한들 한낱 식물에 불과할 뿐이지요. 천녀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모른 채 공연한 집착을 하고 있답니다."
유비는 놀라 반문했다.
"소저께서 손수 가꾸었단 말이오?"
"부끄러울 뿐이옵니다."
유비는 멍하니 여인을 바라보았다. 교교한 달빛 아래 천만가지 꽃으로 둘러싸인 정자에서 꽃향기에 취하는 것도 환상이려니와,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있으니 그는 가히 황홀경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인은 그의 시선을 받자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다시 비파를 끌어안고 탄주하기 시작했다. 비파 위에서 춤추는 손가락은 달빛을 어루만지는 듯, 그윽한 향기를 풀어내는 듯,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천상의 선녀가 하강하여 비파를 탄주하는 듯했다.
며칠 후 유비는 미축의 초대를 받고 그의 저택을 방문했다.
미축은 본래 부호 출신인지라 유비를 위해 마련한 음식상은 가히 진수성찬이었다. 오랫동안 전장을 헤매던 유비로서는 거의 모두가 처음 보는 요리들이요, 그 맛은 가히 요지경이라 할만했다. 그는 미주가효(美酒佳肴)에 감탄하며 조금씩 취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미축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들어오너라."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연남빛 교의를 입은 여인이 비파를 안고 사뿐사뿐 들어오더니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우아하게 절을 했다. 유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소인의 누이이옵니다."
미축의 말은 이미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인을 보는 순간 며칠 전 정자에서 본 여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여인은 그를 보고 수줍은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자리에 앉아 비파를 탄주하기 시작했다.
유비는 비파음을 들으며 술을 마셨다. 좀처럼 과음을 하지 않는 그가 잠깐 사이에 두 단지가 넘는 화주를 마셨다면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미축은 유비의 눈길이 누이동생으로부터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 그만ㆍㆍㆍ 가야겠소이다."
유비는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술상이 빙글 돌았다.
"주공!"
미축이 급히 그를 부축하지 않았다면 술상 위에 엎어질 뻔했다. 유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소. 갈 수ㆍㆍㆍ 있소ㆍㆍㆍㆍㆍㆍ."
괜찮지가 않았다. 미축이 손을 떼려는 순간 유비의 몸이 중심을 잃고 무너졌던 것이다. 미축은 급히 시종을 불렀다.
"어서 주공을 안으로 모셔라."
시종에 의해 부축된 채 내실로 들어가는 유비를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가 있었으니 바로 미축의 누이동생이었다. 미축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언제 주공을 만나 뵈었더냐?"
여인은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며칠 전 밤에ㆍㆍㆍㆍㆍㆍ."
그녀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하자 미축은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더니 내 공연히 주공께 널 소개하려 노심초사했었구나?"
그 말에 여인은 두 뺨을 도화처럼 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하지만 여인의 눈 가장자리에는 분명 기쁨의 빛이 은은히 번지고 있었다.
여복(女福)이 많다함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유비가 눈을 떴을 때 그의 곁에는 비파를 탄주하던 여인이 다소곳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축의 누이인 미씨 소저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 곳에 있는 것이오?"
유비는 눈을 가늘게 한 채 물었다. 미씨 소저는 뺨을 발갛게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오라버니의 분부이옵니다."
"미공이?"
유비는 의아한 듯 반문하다가 짐짓 정색을 한 후 물었다.
"그대는 오라비의 분부 때문에 외간남자의 잠자리 시중을 들러왔단 말이오?"
미씨 소저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듯했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 들어 유비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 때문만은 아니옵니다. 소녀에게도 뜻이 있었사옵니다."
유비는 흠칫했다.
"소저의 뜻이라면?"
"황공하옵니다만 소녀는 오래 전부터 진정한 영웅이 아니라면 이 한 몸 의탁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사옵니다. 오직 비파를 타고 꽃을 가꾸며 살 생각이었사옵니다."
"호오ㆍㆍㆍ 그런데?"
"대공을 뵙는 순간ㆍㆍㆍ 결심하였사옵니다. 비록 오라비의 청을 받들긴 하였으나 실은 며칠 전부터 소녀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사옵니다."
당돌하기 그지없는 미씨 소저의 말에 유비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미씨 소저를 바라보다 탄식했다.
"난 안락한 가정을 꾸릴 수 없는 몸이오. 날 따르면 오직 고통과 인내만 강요될 뿐 아니라 어쩌면 허구한 날을 풍찬노숙(風餐露宿)하게 될지도ㆍㆍㆍㆍㆍㆍ."
"영웅의 아낙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사옵니다. 대공께서는 부디 소녀를 내치지 말아 주옵소서."
미씨 소저는 몸을 일으키더니 옷을 벗으려 했다. 유비는 움찔했으나 이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이리 오시오. 어찌 그대가 스스로 옷을 벗으려 하오?"
미씨 소저가 머뭇거리며 다가오자 유비는 냉큼 그녀를 끌어들여 품에 안았다. 그는 여인의 귓전에 대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름다운 여인의 옷은 사내가 벗겨야하는 법이오."
미씨 소저는 귓가에 뜨거운 입김이 부어지자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유비는 단전 아래로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며 여인의 솜털이 보송보송한 목덜미에 코를 대고 향기로운 체취를 한껏 들이켰다.
밤은 짧았다. 오랜 홀아비 생활 끝에 미인을 품에 안았으니 어찌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있으랴? 더욱이 천성적으로 여색을 밝히는 유비이고 보면 도리어 밤이 지나치게 짧지 않느냐고 불평을 할 지경일 것이다.
"아아ㆍㆍㆍㆍㆍㆍ."
여인의 신음소리가 월창을 통해 흘러나왔다. 한 여인이 지아비를 받아들이는 숭고한 교합의 행위에 달조차 흥이 오른 듯 새벽녘이 되도록 월창에 현란한 빛을 아낌없이 뿌려주고 있었다.
다음날 미축의 누이는 미부인이 되어 유비와 함께 부중으로 거처를 옮겼다. 관우와 장비는 형수를 모시게 된 사실을 아낌없이 축하해 주었고 유비는 간단한 잔치를 열어 정식으로 미부인을 맞아들였다.
그에게는 이미 여러 여인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고향에서 아내나 다름없이 지냈던 감씨(甘氏) 소저가 있었으며, 한때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던 방려려란 여인도 있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유랑하는 동안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으므로 지금까지 궁색한 홀아비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미축의 누이를 받아들인 것은 서주를 차지함으로써 어엿한 한 지역의 패주가 되었으므로 가정을 꾸릴만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유비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자신의 영지를 얻었고 아름다운 아내 또한 얻었다. 그리고 이 소식은 곧바로 한 효웅(梟雄)의 귀에도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뭣이? 그게 사실이란 말이냐?"
조조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흥분했다.
"나는 선친의 원수도 갚지 못한 채 전장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는데 그 자는 화살 한 개 날리지 않고 서주를 차지했단 말인가! 이,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그도 그럴 것이 조조는 아직도 여포와 팽팽하게 한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부친의 원한을 갚기 위해 서주를 치러갔다가 여포에게 영지를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한 것 만해도 분통이 터질 노릇인데 들려오는 소식이라니!
그는 과거 유비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한눈에 유비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유비의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를 보고는 은근히 배가 아프기까지 했었다.
"그땐 촌뜨기에 불과했는데 서주무림의 패주가 되다니ㆍㆍㆍㆍㆍㆍ."
유비가 공손찬의 휘하에 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놈! 비실비실 웃는 얼굴 뒤에 헤아릴 수 없는 야심을 감추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ㆍㆍㆍ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클 줄이야!"
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더 크게 전에 싹을 잘라버려야 해!"
조조는 냉철한 인간이었다. 그는 이미 천하를 읽고 있었다. 무황성이 유명무실해진 지금 무림을 분할하고 있는 호웅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정확히 분석해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 유비는 저만치 제쳐두었던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새 공손찬의 그늘을 벗어나 훌쩍 커버린 것이다.
"차라리 내 밑에 두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결심을 굳히고 군사들을 소집했다.
"당장 서주로 간다. 먼저 유비를 죽인 후 도겸의 시체를 매달아 선친의 원수를 갚아야겠다."
그러자 순욱이 나서더니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예전에 한고조는 관중을 보존하였고 광무는 하내에 자리 잡고 중심을 굳건히 한 후에야 천하를 정벌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그 후 싸움마다 연전연승하여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주공께서는 일찍이 이 곳을 차지하셨는데 천하무림의 요지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만약 이 곳을 비우고 서주로 향한다면 여포가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행여 서주를 얻지 못한다면 이제 또다시 어디로 가겠습니까? 자칫 둘 다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재고하셔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