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아아아아!"
전위는 장소를 터뜨리며 화염 속으로 말을 몰아 달려갔다. 그가 쌍철극을 풍차처럼 휘두르자 악마의 혓바닥처럼 춤추던 화염이 기적처럼 뻥 뚫리며 길이 열렸다. 조조는 황급히 그를 따라 달려갔다.
조조가 막 보문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굉음과 함께 불붙은 보루의 대들보가 떨어져 내렸다.
우지끈! 쾅!
하필이면 대들보가 떨어지며 말 엉덩이를 때리는 바람에 말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억!"
조조는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주변이 온통 화염 천지인지라 그의 의복은 물론 머리카락과 수염이 순식간에 타버리고 말았다.
"주공!"
전위가 놀라 되돌아오려 하는데 마침 하후연이 바람처럼 달려오더니 조조의 손을 잡아 불구덩이 속에서 끌어냈다. 조조는 하후연의 말에 몸을 싣고 구사일생(九死一生)하여 간신히 진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크흐흐흐흐ㆍㆍㆍㆍㆍㆍ!"
조조는 실성한 듯 괴이한 웃음을 토해냈다. 그의 웃음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조조를 둘러싼 수하들은 감히 그를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온통 가책과 비분에 차 있었다. 수하된 몸으로 주군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였으니 차마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조조는 고개를 번쩍 들며 외쳤다.
"날 똑똑히 보거라!"
중인들은 놀라 조조를 바라보았다. 머리칼과 수염이 다 타버린 조조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모두들 내 모습을 기억하도록! 두 번 다시 이런 모습 보게 된다면 그것은 이 조조의 운이 하늘에 닿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그를 둘러싼 고수들과 군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조조는 그들을 둘러보며 차갑게 말했다.
"그대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이 모두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것인즉 어찌 원망하겠는가?"
조조는 냉랭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찮은 여포의 계책에 놀아난 내 잘못이다. 내 반드시 놈에게 진 빚을 갚고 말 것이다."
조조는 태사의로 걸어가 착석한 후 손을 저었다.
"모두 일어나라. 지금부터 놈을 제거할 작전을 짜야겠다."
그 말에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고초를 겪었다면 최소한 몇 날 며칠은 앓아누워야 하건만 조조는 곧바로 싸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가?
곽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계책은 빨리 쓸수록 유리합니다."
곽가는 조조의 의연한 모습에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조조에게는 많은 군사들이 있었으나 조조 자신이 군사들 못지않은 지략을 지닌 인물이었다. 곽가는 그가 이미 복안을 지니고 있음을 눈치 챈 것이었다.
조조는 붓을 들더니 탁자 위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내려썼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글귀였다.
<장계취계(將計就計)>
그것은 적의 계책을 이용하여 적을 물리친다는 병법의 한 종류를 뜻하는 글귀였다. 그를 둘러싼 군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조조는 담담히 말했다.
"오늘밤의 싸움에서 내가 불에 타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라. 여포의 귀에 소문이 들어가면 놈은 보를 나와 공격해 올 것이다. 그 때 무사들을 마릉산(馬陵山)에 매복시켰다가 놈의 허리를 끊고 공격하기로 하자. 그럼 놈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곽가가 빙긋이 웃으며 찬사를 보냈다.
"정말 좋은 계책입니다."
조조는 진중에 칩거한 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후돈을 비롯한 심복들과 곽가, 유엽 등 군사들은 모두 상복(喪服)을 입고 통곡했다. 진중의 무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조조의 계략을 알 리가 없으므로 일제히 바닥에 엎드린 채 비통한 심정으로 곡을 했다. 조조는 철저히 계략을 감추었으므로 심복들과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감쪽같이 속여 넘길 수가 있었다.
본시 피아간에는 첩자가 있게 마련이다. 조조의 진중에서 일어난 일은 첩자에 의해 고스란히 여포에게로 전달되었다. 여포는 조조가 이렇듯 허무하게 죽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나 일편으로는 수긍이 갔다.
"하긴 그 와중에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는 희색이 만면하여 명령을 내렸다.
"어찌 이 기회를 놓치랴! 모두 준비해라. 오늘 밤 조조 무리를 쓸어버리도록 하자!"
그는 수하들을 총동원하여 출동했다. 조조의 본진은 마릉산 너머에 있었으므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산을 완전히 넘어야했다. 마릉산의 산길은 좁고 구불구불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포의 대열은 길게 이어진 채 산을 넘어갔다.
여포가 마릉산을 넘어 조조의 진영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였다. 느닷없이 함성이 울리는 것이 아닌가? 함성은 전면은 물론 좌우와 후미의 먼 곳으로부터도 울려왔다.
"아차! 속았구나!"
아무리 둔감한 여포라 해도 자신이 계략에 빠졌음을 모를 수는 없었다. 그는 경솔했음을 후회하며 급히 퇴각을 명령했다. 하지만 대열이 워낙 길게 늘어져 있는지라 그의 명령은 쉬이 전달될 수 없었다. 더구나 산중에 매복해 있던 조조의 무사들이 활을 쏘고 암기를 날리는 바람에 그의 수하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여포의 무예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천극도를 휘두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나 조조 측에서는 아무도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한 식경이 넘도록 그는 고작 조조의 졸개 수십 명을 죽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싸움은 밤새 이어졌고 여포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결국 그는 반 이상이나 수하들을 잃은 채 복양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여포는 수차례나 승리했지만 이 한 번의 패배로 인해 조조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굳게 보문을 닫아걸고 좀처럼 싸움에 응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몇 차례인가 싸움에 응했다가는 조금만 분위기가 이상하면 퇴각하여 복양을 수비하는 데에 치중했다.
싸움이 장기화되자 조조는 군사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무사들이 지쳤습니다. 모두들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싸우는 것은 무리입니다."
"맞습니다. 일단 물러나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군사들의 의견은 일치되었다. 조조도 별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군.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놈이 움쩍도 않으니 내 어쩌겠는가?"
마침내 조조는 철수할 것을 지시했다.
따지고 보면 여포는 연주를 비롯하여 여러 곳을 차지했으므로 이득이 있다 할 수 있었다. 또한 조조 역시 천하에 두려울 것 없는 여포로 하여금 난생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자존심을 챙겼다고 할 수 있었다. 이로써 복양의 풍운은 잠시 가라앉게 되었다.